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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1~3)>

맑은 바람 2023. 6. 11. 21:12

-아나톨리아 횡단- 베르나르 올리비에

‘두꺼운 책’에 도전하기
나는 도서관이나 아는 이로부터 책을 빌리는 일이 별로 없다.
타인의 냄새가 밴 헌 책도 사양한다.  가끔 손을 베기도 하는 날 선 책을 펼치고 거기에 줄을 긋고 메모도 해가며 새로운 길을 내는 일, 처녀지를 탐험하는 그 기분을 맛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즐거운 독서 체험이다. 그런데 내 서가에는 그 부피 때문에 엄두가 안 나 모셔둔 책들이 꽤 있다.

<슬픈 열대>, <에밀>, <비잔티움 연대기>, <칠층산>, <성경>--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동생네 서가에서 <나는 걷는다>를 꺼내 뒤적이다가 서문 ‘편집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감칠맛’에 이 책의 두께를 잠시 잊었다.

***내 맘을 흔든 편집자의 말
-어떤 결정은 내일로 미루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된다.
-외로움은 때론 힘이 되는 법
-우리 모두에게는 떠남이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모든 걸 벗어버려야 한다

각 권이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임을 세 권을 쌓아 놓고야 인식했다.
통권 1323쪽-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마음 맞는 벗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심정으로 가슴 설렌다.
비포장 길을 타박타박 걷듯 읽을 것이다. 너무 자주 쉬면 리듬이 깨져서 안 되겠지만 진력나지 않을 만큼 쉬엄쉬엄 갈 것이다. 길가의 낯선 꽃도 보고 샘물에 목을 축여가며--

요즈음 들어 왜 사람들은 새삼 걷기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이제는 문명의 이기들--버스 기차 비행기 승용차 승강기 에스컬레이터 등- 구르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다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이동수단이라고 신발차밖에 없던 시절-산 넘고 물 건너 타박타박 하염없이 걷던 등하교길, 나귀에 등짐 싣고 장보러 다니던 아버지, 할아버지-
새 운동화가 아까워 벗어들고 걷던 그길-

이제 너도나도 문명의 이기를 마다하고 다시 그 길 위에 서고 싶어 한다.
서두에 저자는 ‘동양에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걷기 여행 문화, 장거리 여행 체계, 여행을 문학과 결부시킨 일 등이 이미 이곳 동양 사람들에 의해 실현됐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걷고자 하는 실크로드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서안까지 12,000km에 해당한다.

(얼마 전 나는 캐나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6000km를 고속버스와 비행기로 횡단하고는 스스로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는데~~)

베르나르의 관심 대상은 실크로드를 지났던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를 찾아보고 가능하면 그곳에 묵으며 그들의 생각, 감정 그리고 위기를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대상숙소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거나 시멘트를 발라 옛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게 됐다.

***작가의 말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내 목표는 순조롭게 여정을 마치고 4년 후 시안에 도착했을 때 내가 조금은 시인 또는 작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오늘날엔 평균 수명이 연장되고 사회활동이 예순 살에 마감됨에 따라 새로운 모험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은퇴와 더불어 그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 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줏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죽음은 나를 내버려 둘까? 수많은 위험-병, 사고, 폭력-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여럿이 함께 간다면 서로 기대고 돕고 격려해 주고 돌볼 수 있다. 실수를 하거나 약해지는 순간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걷는 길에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 드물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가 여행지에서 터키사람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의 대상이 되어 질문공세를 받을 때마다 느낀 것)

베르나르는 첫 권에서 1700km 지점인 에르주름에서 가던 길을 멈춘다.
강도를 만나서도 아니고 군인의 제지를 받아서도 아니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식사 덕분에(?) 이질에 걸려 도저히 행보를 계속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엠블런스에 실려 이스탄불로 호송된다. 분통을 터트리며--

그러나 베르나르가 여행지 곳곳에서 만난 ‘착한 터키 사람들’ 덕분에,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터키를 훗날, 흔쾌히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베르나르에게처럼 내게 물을 것이다.
“네레데(어디서 왔는가)?”
“네레예(어디로 가는가)?”             

***올리비에는 4년(1099일) 동안 12000km의 실크로드를 무사히 횡단했고, 나는 1년 2개월 만에 마침내 1323쪽 분량의  책을 다 읽었다!!  (2010.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