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2(495쪽~끝)
11.사랑, 전쟁, 스파이 활동
(495)마지막 에로틱한 동반자: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조각가, 아펠-레스 페노사/잘생기고 열정적이며 검은 두 눈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페노사는 재능이 눈부시게 뛰어났고 엉뚱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일 줄 알았다. 게다가 의지할 데 없는 방랑자였다. 이런 매력의 조합은 샤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병약했으나 반항적 기질을 타고나, 부모의 호텔사업을 거절하고 군징집을 거절, 탈출에 성공해서 몽마르트르에 안착하며 친구들을 통해 예술적 아버지를 소개 받는다. 바로 파블로 피카소였다.)
(497)피카소는 젊은 페노사의 재능을 금방 알아보고 그를 보살펴 주고 도와 주었다. 피카소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페노사가 작업하도록 허락했고, 페노사의 작품을 비평했으며, 페노사의 첫번째 파리 전시를 열어주기까지 했다. "그가 없었다면 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페노사가 피카소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제게 생명을 준 사람이예요."
(499)못말리는 매력남 페노사:(그가 파리에서 성공하자 바르셀로나 화랑에서 그의 작품 전시를 제안했다. 그는 지난날 탈영병이었기 때문에 남몰래 걸어서 바르셀로나에 들어갔고 이미 파리 시민이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어서 10년을 살았다. 프랑코 독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걸어서 프랑스 국경을 넘고 체포되었다)
(499)그러나 늘 그렇듯, 페노사는 매력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국경 순찰대에 밤새 붙잡혀 있는 동안 교묘한 말솜씨로 경찰들을 꾀어서 함께 카드를 쳤다. 그들은 밤을 지새우며 시끌벅적하게 벨로트 게임을 했다. 아침이 밝자, 페노사를 감시하던 경찰들은 새로 사귄 죄수 친구가 너무 좋아져서 그의 비자를 조작해 주고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모아 건넨 다음 프랑스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마술이 다시 통했다. 페노사는 갓 알게된 사람을 헌신적이고 심지어는 부모처럼 보살펴주는 보호자로 바꾸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페노사는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바로 이 천재성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피카소는 페노사에게 돈을 주고, 파에야를 요리해 주고. 그의 조각품을 사주고, 베르사유 궁전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를 공짜로 마련해 주었다. 페노사의 새 집은 파리에서 기차로 겨우 45분만에 갈 수 있었다. 새 아파트는 조각하며 지내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페노사는1939년 여름내내 이곳에서 순조롭고 평화롭게 작업했다. 더욱이 장 콕토가 프랑스 외무성에 부탁한 덕분에 합법적인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콕토의 수호천사는 샤넬!)
(500)56세의 샤넬과 마흔이 채 되지 않은 페노사는 만나자 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샤넬은 중년이 되어서도 진정으로 화려한 매력을 유지했다. 그녀의 꼿꼿한 몸가짐은 위풍당당했고, 걸음걸이는 유연하고 경쾌했고 몸매는 아가씨처럼 날씬했다. 사실 샤넬은 페노사가 조각한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성과 닮아 보였다. 게다가 샤넬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모두 검은색이어서 언제나 스페인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샤넬은 즉시 페노사를 자기 세력권 안으로 채어 왔다.
(505)페노사의 갈등:
페노사는 오랫동안 부유한 친구들에게 의존해서 살았지만, 1939년 무렵에는 리츠호텔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리츠에서 지내는 게 신경쓰였네.---너무 화려해서 미쳐 버릴 정도였어!---그렇게 살 수는 없었네. 그런 삶을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506)샤넬과 멀어진 페노사:
페노사는 샤넬의 세상이 너무나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샤넬의 친구 대다수와 달리 페노사의 양심은 언제나 진보적 이상, 공화주의,공감을 가리켰다.
"그녀는 나를 선물로 에워쌌다네. 예를 들자면,거대한 황금팔찌를 줬지.역겨워서 그녀에게 다시 돌려줬네"
(506-508)가난한 자를 대하는 샤넬의 태도:전쟁이 선포된 지 겨우 3주만에 사전 통보도 없이 직원 2500명을 전부 해고하고 부티크와 스튜디오를 폐쇄했다. 또 남동생들에게 매달 보내던 돈도 느닷없이 끊어버렸다.
(509)초토화 전술:샤넬은 전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를 불태웠다. 캉봉 부티크는 대부분 텅 비었지만 계산대 하나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샤넬이 막대한 재산을 쌓을 수 있었던 주요 원천인 향수를 팔기 위해서였다. 샤넬은 향수로 벌어들인 돈을 대체로 스위스 은행에서 개설한 여러 계좌에 넣어 두었다.
(512)페노사는 샤넬을 떠났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마약이었네. 만약 마약을 사용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도 같이 마약을 하게 돼. 그렇지 않으려면 상대가 반드시 약을 끊어야만 하네."샤넬은 약을 끊지 않았고 페노사는 떠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둘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
(516)무방비도시open city:폴 레노 총리는 파리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했다. 파리와 인근 도시 인구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인구의 4분의1이 탈출했다. 1940년 6월14일, 독일군은 반쯤 비어 있는 파리에 입성했다.
(518)페탱의 비시 정권:1차세계대전의 영웅/84세/나치의 괴뢰정권/페탱 정권은 반파시스트 인사와 레지스탕스 대원, 유대인, 동성애자, 집시는 물론 바람직하지 못해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 수용할 포로 수용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를 수십 군데 건설했다.--유대인은 기업을 소유할 권리를 잃었다. 유대인이나 반 독일 인사로 보이는 사람이 만든 예술과 문학, 공연을 금지했다.
(520)파리의 독일군: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해서 거처로 삼을 만한 가장 훌륭한 주택 대다수를 징발한 후, 카바레와 보드빌 공연장,극장, 레스토랑을 다시 열었다. 독일군은 흠잡을 데 없이 품위 있고 정중하게 행동했고, 세심하게 조정된 매력 공세를 퍼부었다. 나치는 파리를 파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반대로 파리를 그들의 왕관에 박힌 가장 매력적인 보석으로 만들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가능한 한 저항을 적게 받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파리 시민을 다시 파리로 꾀어 와야 했다. 나치는 이 계획에 성공했다.
(521)포로로 끌려간 조카 앙드레 팔라스:"만약 그 애가 나치수용소에서 비명횡사하기라도 했다면 전 절대로 계속 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샤넬은 커다란 슬픔과 강철 같은 의지를 품고 조카를 구하러 나섰다. 이 과제는 나치의 최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를 이용하는 일을 수반했을 것이다.
비시정부의 부총리 라발이 개입했을 여지가 있다. 그녀를 나치 고위 인사들이 차지한 리츠호텔로 돌아가게 할 수 있었던 사람도 라발이었을거라 추측
(530)샤넬의 반역행위:독일점령기에 프랑스 국민은 엄청나게 많은 방법으로 나치에 부역했지만 우리가 그들 대다수를 쉽사리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샤넬의 부역은 평범한 부역이 아니라 열렬한 나치 추종자였음을 드러낸다.
그녀는 나치를 위해 "병풍을 펼쳤고"제3제국 첩보기관의 급여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533)나치장교 한스 귄터 폰 딘클라그, 별칭 스파츠('참새'라는 뜻):이혼남 딘클라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고 잘생겼다.
1940년 그는 44세로 샤넬보다 13살 더 어렸다. 독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는 정중하고 우아했다. 또 그는 언어에 능통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바람기가 있었다. 그는 스파츠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새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론다 개어릭의 서술과 묘사 방법은 이 책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마력이 있다.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할 사람이다)
(540)배척 받는 유대인:1940년 9월 유대인법 발효/유대인은 공직에 오르거나 다른 영향력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심지어 공중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다. 유대인이 운영하던 기업 수천 곳이 몰수당했고 유대인이 소유했던 예술품과 부동산은 압류당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 내 인구의 절반이 나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핍박받는 유대인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베니스의 상인' 이야기가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의 공통된 정서였나 보다. 종교가 다르니 공동의 적을 만들기는 쉬웠다. 땅이 없는 유대인이니 그들은 언제 쫓겨날지몰라 부지런히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걸 빼앗고싶어 안달이 난 인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죄를 만들어 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고 알거지를 만들었다. 거기 앞장 선 인물이 히틀러! 나는 그들이 언젠가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事必歸正!)
(544)나치에 협력하는 프랑스 상류층:독일의 파리 점령은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민주정 이전 시대를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밖에서는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 완고하고 보수적인 귀족들은 영화로웠던 과거의 왕족처럼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545)샤넬의 첩보활동:1941년 늦여름, 샤넬은 새로운 즐길거리를 발견했다. 독일 정부는 조카를 석방해 준 댓가를 요구했던 것 같다./이미 게슈타포 요원이 된 프랑스 귀족 보플렁은 샤넬의 첩보활동의 댓가로 유대인인 베르트하이머 형제에게서 향수 사업 통제권을 뺏도록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샤넬이 해야 할 임무는 마드리드로 가서 독일에 매우 유익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전부였다.
(547)조카가 석방되어 돌아오던 날:"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어요. 파리 전 역의 종이 모두 한꺼번에 제 안에서 크게 울리는 것 같았죠."
(548)베르트하이머 형제:베르트하이머 가족은 부유한 유대인 가족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피신했다. 형제는 뉴욕으로 이주해서 독자적인 자회사 샤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형제의 선견지명과 경영 감각은 제3제국의 결정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형제는 나치를 매수했고 그들의 재산을 지켰다./이 전쟁의 혼탁한 정치, 매국과 애국 사이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나치라는 기계를 가끔 고장낼 수 있는 돈의 힘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시는 없을 것이다.
(569)새 애인 셸렌베르크:딘클라그의 상사/자신의 인생과 권력에 대한 관점이 야심차고 심지어 원대했다./샤넬과 셸렌베르크는 거액의 판돈이 걸린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는 첩보활동이 황홀한 쾌감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샤넬은 60세에 마타하리 놀이를 하기 위해 은퇴생활에서 벗어났다. 키가 크고 잘생긴 33세의 셸렌베르크는 그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런 스파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576)샤넬의 배신:
연합군이 파리에 더 가까이 진격해오자 샤넬과 나치 협력자 무리는 설자리를 잃어 갔다. 더는 승자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데다 보복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점차 커지자 샤넬은 선제 공격에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샤넬은 지지하는 편을 바꾸고 이제 승전 가능성이 높아진 쪽과 제휴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 즉 피에르 르베르디에게 연락해서 잘 알려진 나치부역자의 소재를 알려줬다.그는 드 보플렁이었다.
(578)샤넬이 가볍게 풀려난 이유:처칠이, 나치에 협조한 윈저공이나 웨스트민스터 공작에 관한 정보를 발설할까봐 선수를 쳤을 거라 한다./스위스 로잔으로 망명한 그녀는 그곳에서 8년 동안 살았다.
12세상에 보여주다:샤넬이 복귀하다
--그들은 내가 구식이라고, 내가 한물갔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내가 보여 주지"--코코 샤넬
(582)샤넬의 호텔생활:호텔생활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호텔은 편했다. 하루 24시간 내내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친구들을 대접하기에 적당한 식당과 라운지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텔은 자유, 홀가분함, 내키는 대로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의미했다.
(누군가가 70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주방을 드나들지 않겠다며 호텔 생활을 선언했다. 얼핏 듣기에 편하고 좋을 듯 싶지만 거기에도 구속은 있다.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는 건 좋을 수 있지만 영양사의 요리는 며칠만 먹으면 질린다. 내가 만들어 먹는 자유를 내주어야 한다. 돈이 술술 나가고 직원들의 과잉 친절(?)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불편하다. 쉬운 게 없다.하긴 쉽다고 다 좋은 건 또 아니다)
(587-589)애인과 친구의 사별:1950년, 미시아 세르가 죽고 딘 클라그도 죽었다. 1946년부터 1956년 사이에 샤넬 세대에서 가장 눈부셨던 빛들이 무서운 속도로 꺼져가고 있었다.
(599)베르트하이머 형제와의 인연:(미국으로 건너간 하이머 형제는 향수 판매로 거대한 부를 이뤄갔다. 복수의 기회를 노린 샤넬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서 도전에 나섰다. 이를 재빨리 간파한 베르트하이머는 협상에 나섰다. 샤넬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서 샤넬이 확실한 부자가 될 수 있게 했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는 샤넬과 싸워서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게 사업을 위한 논리적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 속 깊이 샤넬과 샤넬의 재능을 존경했다. 강력하고 변치 않는 이 마음은 억지스러운 사랑과 같았다. 코코 샤넬과 베르트하이머는 신랄한 싸움과 화해, 새로운 협력으로 이어지는 매우 격렬한 갈등에서 벗어나지못했다. 이 갈등의 양상은 이들이 오래 전에 연인 관계였다는 끈질긴소문을 뒷받침한다.
(602)크리스찬 디오르의 등장:
비료사업으로 부자가 된 집안의 아들/부유한 후원자 마르셀 부삭의 지원을 받음/1947년 2월12일 C.D.의 첫 컬렉션이 파리의 패션계를 강타했다.
무슈 디오르, 우리에게 진정 '뉴 룩'을 선사했군요."/'뉴 룩'은 패션용어로 굳어졌다./디오르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터지면서부터 심각하게 침체한 프랑스 패션 산업도 다시 일으켰다. 화려한 뉴 룩은 프랑스의 풍요로움, 프랑스 럭셔리의 귀환을 선포했다./패션계 언론은 디오르를 쿠튀르의 메시아로 여기며 환영했다. 그는 사실상 하룻밤만에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사, 새로운 여성 실루엣을 창조해낸 예술가가 되었다./(모조품이 싼 값에 팔리기도 했지만)디오르 스타일은 쉽게 질 나쁜 모조품으로 만들 수 없었다. 샤넬과 달리 디오르는 그 고급 옷감을 아주 많이 사용했고 그래서 바느질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했다.
(608)샤넬의 반격:
샤넬은 패션이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어 그녀의 비젼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체적으로(1937년, 콕토의 연극 무대 의상을 제작할 때 그녀의 조수였던)디오르에 관한 질문을 받자 폭발했다.
"디오르? 그는 여성에게 옷을 입히는 게 아니예요. 여성의 몸에 덮개를 씌우는 거예요!" 지칠 줄 모르는 성격이면서도 지루하게 생활해야 하는 데다 새로운 파리 디자이너들의 작업에 경악한 샤넬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성한 디자이너 경력을 재개하는 것, 즉 복귀를 고민했다.
(609)샤넬은 다시 한 번 해낼 수 있다는 직관, 패션계로 복귀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직관에 따라 움직일 기회를 붙잡았다.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치 협력으로 오명을 얻은 70세 노인이었고, 14년간 문화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샤넬은 언제나 예상에 저항할 때 가장 높이 날았다. 그녀는 베르트하이머를 만나고 며칠 후, 여전히 소유하고 있던 리츠호텔 객실로 돌아갔다.
(610)미국 시장 진출:
샤넬은 전에 도움을 주었던 미국의 지인에게 샤넬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미국 기업을 찾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마침 경제가 한창 호황을 맞으며 기성복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즉, 미국시장은 샤넬이 다시 패션계에 진입하기에 가장 알맞은 것이었다.1953년 9월, 일류 기성복 제조업체를 소개할 수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샤넬은 즉각 답장을 보냈다. "첫 컬렉션은 11월 1일까지 완성할 거예요."
(611)(샤넬의 명성이 살아나면 향수 판매가 증가하리라고 계산한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는 컬렉션 출시에 들어가는 비용의 50%를 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613)샤넬의 모델들:모델의 몸에서 곧장 디자인을 만들어 나가는 샤넬은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이 새로 필요했다. 샤넬은 원하는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샤넬은 위엄있고, 자신있고, 침착하고, 세련되고, 자기자신과 다르지 않은 스타일을 원했다.---샤넬은 사교계에 데뷔하는 프랑스 최상류층 가문의 딸들을 은밀히 모델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샤넬의 모델은 오델 드 크로이 왕녀와 미미 다르캉게 여백작, 로스차일드 은행 중역의 딸인 아름다운 18세의 마리-엘렌 아르노 등 귀족 작위를 받은 부유한 여성이었다.
(615)새 컬렉션이 열리던 날:
1954년 2월 5일/"2천명이나 간절히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었죠."/밀치고 밟히고 굴러떨어지고---/그러나 샤넬은 1930년대 디자인 회고전을 연 것처럼 보였다./드라마는 전혀 없었다./"애타게 기다렸던 샤넬의 복귀는 그녀의 추종자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르 몽드
(622)샤넬 컬렉션에 대한 미국의 반응:
미국인은 샤넬의 컬렉션에서 옷을 입는 신선하고 현대적이고 해방적인 방식을 발견했고, 이 방식은 자유롭고 편안한 삶이라는 미국의 에토스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에토스the ethos--(어떤 문화의 근본적) 특질/성격
미국 바이어들은 서둘러 발주 세례를 퍼부었다. 몇 주 안에 미국 부티크에서 샤넬작품을 더 많이 주문했고,길모퉁이의 옷가게부터 대형 백화점까지 미국 전역의 상점에서 샤넬 컬렉션에 영향을 받은 디자인을 진열대에 걸었다.
(623)"그녀는 71세에 우리에게 스타일 이상의 것을 가져다 줬다. 그녀는 진정한 폭풍을 일으켰다. 그녀는 복귀하기로 마음 먹었었고, 과거에 올랐던 자리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바로 최고라는 자리였다.--'라이프' 지
(624)유럽 언론은 샤넬이 거대하고 극도로 중요한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듣자, 논조를 상당히 부드럽게 바꾸었다. 샤넬이 기존 스타일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쏟아냈던 불평은 샤넬의 '한결같음'에 대한 찬가로 바뀌었다.(이런 걸 언론 플레이라고 하나?)
(626)(베르트하이머는 샤넬 제국을 통째로 사들이고, 샤넬을 평생 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627)샤넬은 베르트하이머와 계약하며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업무에서 모두 벗어나 인생에서 책임져야 하는 일을 사실상 전부 부유한 남성에게 맡긴 채 산업계 거물에서 코르티잔으로 되돌아갔다. 코코 샤넬은 유복한 보호자의 자애로운 통제를 받으며 경력을 시작했듯,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경력을 끝냈다.
(629)샤넬은 베르트하이머와 지독하게 싸웠지만, 샤넬의 인생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유일한 남성은 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였다. 그리고 샤넬은 강력하고, 수완 좋고, 억만금까지 쥐고 있는 베르트하이머의 품에 안겼다.
(630-631)언제나 그랬듯, 샤넬은 색깔과 질감을 다루는 재주를 발휘해서 슈트와 드레스에 특별히 호화롭고 흥미로운 면을 더했다. 샤넬은 선호하던 부드러운 중간 색조를 계속 고수했고, 시골이나 블로뉴 숲을 거닐 때 발견했던 자연의 색조를 재현하려고 했다./샤넬은 선명한 색깔을 딱 하나 사용했다. 샤넬은 드라마틱한 빨간색 슈트를 여러 벌 선보였다.
(632)플리티드 스커트(주름 치마)를 유행시킴:
편안하며 입고 걸어다니기에도 좋다./이 치마는 즉시 큰 인기를 얻었고, 모든 수준의 의류 제조업체들이 샤넬의 치마를 모방한 옷을 급히 만드느라 법석을 떨었다.
--이 우아하면서도 경쾌하고 힘찬 특징은 샤넬이 1950년대 내내 의지했던 추진력이었다.
(633)1957년 9월 9일, 미국은 공식적으로 샤넬을 패션계를 정복한 영웅으로 일컬으며 환영했다. 그날, 스탠리 마커스가 샤넬에게 '패션계의 오스카상'으로도 알려진 니먼 마커스 패션계 공로상을 수여했다.
(635)앞다투어 찬사를 보내는 미국 언론:
"짙은 갈색 눈동자와 빛나는 미소, 꼭 스무살인 듯 억누를 수 없는 생기까지, 74세인 마드무아젤 샤넬은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뉴요커' 기자 길과 로스
"프랑스 디자이너의 드레스가 품은 젊음의 철학은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로 받아들여졌다."--'뉴욕 타임즈'
(641)울 부클레 슈트:
1954년 탄생/장식용 매듭 끈으로 테두리를 두른 슈트 재킷
(643)다른 디자이너들과 다른 샤넬:
샤넬은 보안 보증금에, 혹은 어떤 종류든 '보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샤넬은 어떤 품질이든 자기 작품의 모조품을 환영했다. 그녀는 어느 기자에게 "패션은 거리를 뒤덮어야 해요."라고도 말했다.
(645)샤넬의 페르소나:
*페르소나--말이나 글 또는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내는 내용
사계절 내내 날마다 같은 슈트(주로 가장자리에 리본장식이 달린 베이지색 부클레 슈트)를 입었다./샤넬 스타일을 상징하는 보터(boater 밀짚모자, 맥고모자)/160cm, 45kg/짙은 눈썹화장, 진한 빨간색 립스틱
(650)샤넬 왕국에서의 샤넬:
샤넬은 스튜디오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수십 살이나 많았지만 절대 지치지 않았다. 그녀는 중간에 식사하거나 물 한 잔 마시려고 잠시 쉬지도 않고 한 번에 아홉 시간 동안 서 있을 수 있었다. 회장실에도 가지 않은 것 같았다.
(656)늘어만 가는 수다:
샤넬의 수다 주제는 다른 사람에 관한 험담이었다./그녀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 가르쳤어요./가장 신랄하게 말했던 대상은 동료 디자이너들이었다./재능이 훌륭하다고 인정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만 예외였다.
(667)'코코'를 뮤지컬로 만들다:1969년 12월 18일/마크 헬링거 극장/캐서린 햅번 주연/프로듀서 프레데릭 브린슨/뮤지컬은 흡족할 만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9개월여 동안 329차례 상연되었다.
/샤넬은 초연이 열리기 얼마 전 가벼운 뇌졸증으로 오른손에 마비가 와서 끝내 뮤지컬을 보지 못했다.
(675)샤넬의 변함없는 작업 활동:
뇌졸증ㆍ관절염ㆍ협심증ㆍ만성 불면증ㆍ몽유병 증세에도 불구하고 바느질을 계속함/일은 샤넬을 세상과 이어주는 생명선이었고 샤넬은 이 생명선을 단단히 붙잡은 채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678)샤넬 인생의 마지막 남자:
집사 프랑수아 미로네/키가 크고, 강인하고, 카리스마가 있다/1965년 33세로 샤넬의 집사가 됨 /노르망디 농부집안의 아들인데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많이 닮음/미로네에게 집과 금융거래 관리 책임과 보석보관함 열쇠까지 모두 맡김/그러나 미로네는 왕족과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열망도 없었고 샤넬의 변덕에 항상 뜻을 굽히지도 않았다.
(680)미로네는 샤넬의 제안(청혼)을 거절하고 자립하려고 은밀히 노력했다.
(682)샤넬왕국의 계승자는 누구?:
1970년, 의류와 섬유, 향수, 보석 네 개 부문으로 구성된 라 메종 샤넬은 직원을 총 3천5백 명 고용했다. 1970년 매출은 전년 대비 30%성장했다.
(683)샤넬의 죽음:
1971년 1월10일 오후 8시30분경
리츠호텔 스위트 룸에서/그녀 곁엔 가정부 셀린이 있었다./그녀의 유언장엔, "나는 리히텐슈타인 파두츠에 있는 COGA 재단을 나의 모든 권리를 포괄하는 유일한 상속자로 정한다"라고 했다./리히텐슈타인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세 관할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687)샤넬의 장례식:
1971년 1월 13일/캉봉 거리 근처의 마들렌 사원에 수백 명의 조문객이 몰려듦/그들 중 누구도 검은색 옷을 입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젊은 여성들 모두 마드무아젤의 트레이드 마크인 슈트를 다양하게 입었다./샤넬은 마들렌 사원에 묻히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후, 샤넬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가족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행렬이 스위스 로잔을 향해 떠났다. 샤넬은 제네바호수 근처에 있는 아릅답고 푸른 브와-드-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694)샤넬의 부활:
1983년, 라 메종 샤넬의 소유주 알랭 베르트하이머는 55세의 독일 출신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를 아트 디렉터로 임명했다./옷을 잘입고 어마어마한 저택들을 소유하고 과거를 숨기고 심술궂고 남을 헐뜯곤 하는 점들이 마드무아젤의 유령과 대결할 만했다.
(695)시간이 흐르고 라거펠트는 샤넬의 재단에서 예배드리는 일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존경은 창조가 아니죠.샤넬은 잘 알려진 명물이에요. 그리고 그런 명물은 창녀처럼 다뤄야 해요."
이 우상 파괴정신은 샤넬 하우스에 충격과 활기를 주었다.
(긴가민가 했는데 이 글을 쓴 이가 여성이었다니---글이 활력있고 유머러스하고 때론 냉소적이라서 흥미로웠는데-- 중도에 덮어버릴 생각 나지 않게 끝까지 읽을 수 있는 힘을 준 작가와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깊이 빠져들 수 있게 해준 번역가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