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대흥사-미황사-윤선도고택
一泊二日 동안 욕심을 좀 부렸다.
금요일 아침 일찌감치 출발해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변산반도에 다다라 <능가산내소사>의 꽃창살을 보고 채석강의 日沒을 본 후 해남까지 가서 대흥사 <유선여관> 장작불로 덥힌 따끈한 온돌에서 잔다.
다음날 아침 두륜산대흥사를 둘러보고 절간에 있는 찻집에서 명상음악을 들으며 우전차 한 잔 마시고, 詩的 靈感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달마산 美黃寺를 찾는다. 매표소에서는 절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더니 전나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남한의 금강산이라는 비유가 딱 맞아들게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가운데 단청을 입히지 않아 질박한 느낌이 드는 미황사가 그 수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육지의 최남단 ‘땅끝’에 서서 남해의 출렁이는 바닷물에 켜켜이 쌓인 시름, 실패에서 실 풀어내듯 모두 풀어놓고 다시 돌아서서 올 한 해 힘차게 달려보리라 하다가, 안 돼지! 넘어지면 이제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부서지는 나이이니 조심조심 한 발 한 발 여울목 징검다리 건너듯 한 해를 건너리라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귀경길, 윤선도의 종택 녹우당 앞뜰에 앉아 비자나무숲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강직했지만 노비들에게 넉넉했던 윤선도를 잠시 묵상했다.
밖으로 나와 고산유물관을 둘러보다가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다.
그 孤寂한 곳에서 너무도 열심히 관광객 안내를 하는 목소리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 들으니 처음엔 몰랐는데 발음이 이상했다. ‘는’이라고 써야 할 때 ‘은’이라고 쓴다든가, 받침을 정확히 소리 내지 못하는 것 등등--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나라 사람 아니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네, 맞아요. 중국 길림성에서 온 중국인이예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가슴이 아려왔다.
한문이 양반의 전유물이던 조선시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시조문학의 꽃을 피운 고산 윤선도가 아닌가!
한때는 고산의 전기나 고산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은 욕심도 가져볼 정도로 고산을 좋아했는데, 내 나라 사람은 다 어디가고 이방인이 이곳을 7년째 지킨다니-- 아무래도 하던 일 다 집어치우고 내가 여기로 와야 할까 부다.
밖으로 나오니 봄을 부르는 비안개가 소리 없이 내리고 어느새 내 가슴도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2006.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