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인생만화 (人生萬花)>
열림원/344쪽/1판1쇄 2008.1/1판3쇄2008.2/읽은 때 2023년 11월 24일
박재동(1953~)서울대 회화과/울산사람/고등학교 미술교사 하다가 한겨레신문사 만평 담당/
후에 에니메이션 전문 기획사 <오돌또기> 운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역임
(128)행복한 천형
오늘은 그냥 가자
정말 그냥 가자
독한 맘 먹고 그냥 가자
시멘트에 핀 들풀도
궁그는 낙엽도
종종 걷는 사람들도
그리지 말고 그냥 가자
없는 시간
걸음을 재촉하자
그런데 저기 하늘
아!
하나 남은 빨간 감
도리없이 걸음을 멈춘다.
집밖을 나서지 말아야 해
아예 눈 뜨지 말아야 해
아아,
행복한
천형(天刑)이여!
(129)나는 출근길에 여기저기 눈이 머무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 골목에서나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면 대상과 대화하게 되고 친해지고 사물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결국은 사랑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대상을 사랑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천천히 그리면 다 그림이 되어 어떤 때는 내가 마이다스의 손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은 사물 자체가 원래 황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실 습관이어서 그리지 않고 있으면 언제 황금이었냐 싶게 그냥 사물로 돌아가 버린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침에 골목을 나서면 이런저런 것들이 그려 달라고 발목을 잡는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 한 편의 시와 산문 속에 화가의 철학이 담겨 있는 듯싶다)
(191)내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
진달래야. 어쩌자고 이토록 피어 날 못 견디게 하니?
개나리야 어쩌자고 날 간질여놓아 못 견디게 하니?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를 그려야 하고
개나리가 피면 개나리를 그려야 하고
목련이 피면 목련을 그려야 하고
민들레가 피면 민들레를 그려야 하고
고들빼기가 피면 고들빼기를 그려야 하고
무꽃이 피면 무꽃을 그려야 하고
배추꽂이 피면 배추꽃을 그려야 하고--
그러니 내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겠지?
그러니 꽃들아 내가 천 년을 살도록 하느님께 속삭여주렴.
이러고 있는데 또 매화가 피었다.
(박재동이라는 사람을 몰랐다. 그럼에도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화가의 책도 한번 봐야지 하며 주문했던 책이 바로 <인생만화>다. 읽다보니 재밌고 여러 가지 궁금증도 일어 책 속에서 간접 광고한(?) 이 책 저 책을 주문하게 되었다. <노근리 이야기>1부와 <짱뚱이> 시리즈 6권을 주문했다. 짱뚱이 시리즈는 내가 먼저 읽어보고 손녀에게 생일선물로 주어야겠다. 아, 위의 책들이 초등학교 1학년 수준에 안 맞는다면 박연의 <들꽃이야기>를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