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인천광역시

안평대군의 자취를 찾아(3)-강화 교동도

맑은 바람 2013. 7. 26. 14:26

 

고양시에서 강화도는 멀지 않다. 답사팀은 만장일치로 내친 김에 강화를 향한다. 

마지막 배가 7시15분에 교동도에서 떠난다니 시간이 촉박하다.

 

한적한 섬,

유배지의 설움이 마음을 짠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참 평화롭고 아늑한 섬이다.

날 잡아서 아침부터 들어와 <강화나들길>을 걸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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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1418-1453)

이름은 용()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아들

총명하고 書畵에 능함

<몽유도원도> 跋文을 씀

 

수양은 안평대군이 김종서로부터 받은 시 한 편을 빌미로,

모반을 획책한 내용이라는 혐의를 씌워 강화 교동도로 유배 보낸 후

이틀 뒤에 사사(賜死)한다.

 

그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大空本寂寥 玄化憑誰訊

(큰하늘은 본래 고요하고 공허하니  현묘한 조화를 누구에게 물으랴)

人事苟不差 雨暘由玆順

(사람의 일이 진실로 어그러지지 않으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그로 말미암아 순응한다.)

隨風着桃李 灼灼催花信

(바람이 복숭아 오얏꽃에 부딪치면  화사하게 꽃소식을 재촉한다)

沾濡及麥隴 率土均澤潤

(촉촉한 윤기가 보리밭을 적시면 온 땅이 고르게 윤택해지리라)

 

 갈매기를 따라

 

 한가롭고 평화롭다

 

 배에서 바라본 교동도. 강화 <창후리선착장>에서 15분 거리다

 

 

 

 

 

 

 

   교동도에서 처음 만난 주민-친절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조근조근  질문에 대답해 주신다.

   그분 덕분에 교동도의 인상이 좋게 느껴진다.

 

                             <교동읍성>의 흔적을 찾아

 

   수령 300년이 넘은 저 느티나무는 조선말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모두 지켜보았겠지~

 

                      계단 위쪽으로 관사가 많았었다는데 지금은 잡풀만 무성하다

 

                         <교동도호부>가 있었던 자리-관아와 객사, 누각 등의 관청 건물이 많았으나

                          누각의 기둥만 남아 있다.

 

 <황룡우물> 조선 태종 때 황룡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우물

 

                      <연산군 잠저지>

                      조선 10대왕 연산군도 이곳에 유배와서 죽게됨.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관아가 있었으니 곳곳에 우물이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도라지꽃만 무심히 피어나고--

 

  벼논

 

  교동도에서 가장 유적다운 유적 <교동읍성>  홍예문

 

  홍예문 앞의 돌거북

 

 조선 인조 7년(1629)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은 읍성.

 둘레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다.

 고종 때 개축했으나 1921년 폭풍우 때 문은 모두 없어짐

 

    <남루>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아주 오래전 배를 묶는데 썼다는 돌-바로 앞에 남산포라는 포구가 있다.

 

              강화에서 만난 좋은 식당-빠른 세상에서 바른 느림~~

 

  장작불 가마솥에서  곰국을 고아 낸다.

 

        국물맛이 진짜다. 고들빼기김치도 아주 맛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