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집/126쪽/초판 1997.12/작가정신/읽은 때 2025년11월30일
이생진(1929~2025.9.19)
<그리운 성산포><하늘에 있는 섬> 등 섬을 소재로 한 많은 시를 씀
---달팽이들이 만재도에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은 풀이 좋고 습도가 알맞고 살기 좋아서 그런 것이다.
바다도 좋지만 산도 좋았다.
그래서 이 마을 인심은 곱고 맑았다.내 영혼이 끌린 것도 그 산세의 수세 때문이다.
내가 시를 연일 토해낸 것도 바다와 산과 사람의 정이 詩心을 울렸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내 정신이 아니었다.
詩心 바로 그것으로 숨쉬고 그것으로 밥을 먹었다
--며칠을 살자고 울다가 떠난 매미처럼 벗어놓은 껍질이 이 시집이다.
그 껍질을 들고 매미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도 이 시집에 포함된 한 편의 시다.
--시인은 10년을 별러 1997년 6월에 만재도 땅을 밟았다. 그리고 거기서 만재도를 소재로 93편의 시를 썼고 그 해 12월에 이 시집을 출판했다.--自序에서
(내가 만재도 여행을 계획한 이유다. 얼마나 섬이 아름답길래(?) 시인의 영혼을 사로잡았나, 그것이 알고 싶다!)

(14)하늘에 있는 섬
이 비경을 나만 보여주기 위해
어젯밤 조물주가 새로 만든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어젯밤에 태어났다
손톱 사이에도 때가 끼지 않았다
비공개리에 공개된 섬
만재도
배에서 내려 찾아가면 없고
없어서 다시 배에 올라타면 나타나던 섬
십 년을 그짓하다 오늘에야 올라간 섬
만재도
그 섬을 놓치지 않기 위해
큰산 물생산 장바위산
나도 검은 염소가 되어
염소들 틈에 끼어 따라다녔다
그들은 내가 염소인 줄 알고 마음놓고 다녔다
이 섬은 내가 염소이길 바랬다
(62) 보이지 않는 섬
만재도에 가고 싶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오지 말라고 했다
아니 만재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아예 만재도는 없다고 했다가
만재도는 당신의 꿈 속에 있을 뿐이라고 했다
만재도에 갔다온 사람들도 쉬쉬했다
만재도를 숨기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만재도에 갔다왔으면서 만재도는 없다고 했다.
(64)지도에 없는 섬
영혼의 섬이기 때문에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도에 나타날 때까지 키워야 한다
영혼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좁쌀만하게 이름도 달지 않고 나타난다
그때 몇 채의 가옥도 함께 나타난다
환상의 신기루 속에는 인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2025년 11월, 종로 문화재단이 발행한 책에 <지도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그 속에 있듯, 시인은 '지도에 없는 섬'에 섬을 그리고 다녔다)
(88-89)사람들은 날 보고 선택받은 남자라고 했다
시인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고 싶다
만재도, 그 분위기의 울타리 안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하고 싶다
만재도, 그 달빛 아래에서
사랑 한번 실컷 하고 싶다
만재도, 멀리 산 끝까지 걸어가고 싶다
하늘도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람들은 나보고 선택받은 남자라고 했다
이런 신비한 섬에 온 것이 누구의 덕이냐고 했다
마늘밭에서 마늘 하나 뽑아다 고추장이랑 먹고 싶다
이런 좋은 데 와서도 먹고 싶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이런 좋은 데서 먹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런 날씨
이런 하늘
이런 땅
이런 바다
이 섬을 너 말고 누구에게 주겠느냐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부처님이 주신 것이니 부처님께 합장하라
나는 그 사람 말을 믿는다
(103)등대로 가는 길 8
밤엔 사뭇 외로워서
등대는
불빛이 아니라
눈물이었어
낮에 무심했던 갯기름나물꽃이
나를 에워싸고 나가지 못하게 했어
만재도에선 엉겅퀴가 등대 같았어
(107)10년만에 찾은 섬
사람들은 날 보고
혼자 무슨 재미로 다니겠느냐 누군가 동행할 거라고
이니면 섬에 숨겨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내가 그들이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하지만 섬 동행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섬에 숨을 수는 있어도
섬에 숨겨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섬을 숨겨둘 수는 있어도
여자를 숨기긴 별을 숨기기보다 어렵다
별을 숨겨본 적이 있느냐
저것은 내 별이라고 혼자서 점찍어놓은 별
만재도는 그런 별이다
더러는 남자들 중에 섬에 따라가겠다고
집을 나선 사람도 있었지만
흑산도쯤에서 뱃멀미를 하고 나더니
공중전화기에 매달려 돌아가겠다고 아내에게 호소히는 것이다
결국 도시생각 때문에
아파트 생각 때문에
엘리베이터 생각 때문에
돌아서고 말았다
그래서 누가 섬에 가느냐고 물으면
머리부터 흔들었다
적어도 만재도만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숨긴 진주처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만재도가 공개되면
만재도의 신비가 누설되니까
그 섬만은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공개되는 그날부터 신비성이 사라지니까
사라진 섬을 되찾으려면 10년을 더 기다려야 하니까
(110-111)달보는 시인
수근거린다
'그 사람은 시인이라 하던데'
하루는 장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가
菊島 저 넘어 수평선을 보고
하루는 물생산 꼭대기에 올라가
염소랑 바다를 보는데 염소 같더라고
하루는 풀숲을 헤치고 등대에 올라가
등대 밑에서 바다를 보는데 등대 같더라고
밤엔 선착장에 나와 땅바닥에 누워 별을 보는데
별 같더라고
혹시 사별한 사람 아닌가
혹시 짤린 사람 아닌가
혹시 자살기도하는 사람 아닌가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목사님께 물어봤대나
그랬더니 목사님 말이
'시인이란 시래기 같은 사람이지만
눈 하나는 수정같이 맑다'고
다음날 마을 여자들은 시인의 눈을 보려고
물길러 가서 마주친 시인의 눈을 보다가
물을 엎질렀대나
(114)독자에게
나는 당신에게 이 시집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읽다가 덮어둬도 좋다
읽다가 졸아도 좋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 달라
만재도는 하늘에 있는 섬
아무나 갈 수 있는 섬이 아니라는것을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환상 때문에 멀미를 일으킬거라는 것을
그 멀미엔 약이 없으니
만재도엔 약국이 없으니
만재도엔 의사가 없으니
만재도엔 술이 없으니
만재도엔 거짓이 없으니
만재도엔 내가 없으니
없는 것을 요구하지 말라
만재도엔 무엇이 있는가 그건 가봐야 알지만
분명 네가 찾는 하나는 있다
왜 이렇게 하늘이 가까운가
(119)낚시꾼과 시인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봤다고 했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짊어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봤느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 했더니
시는 어디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122)없다
이 섬은 없다로 시작된다
이 섬엔 사람이 없다
갯가에서 그물과 낚시를 만지던 사람도
가까이 가보면 없다
집은 있는데 사람이 없다
산은 있는데 나무가 없다
학교는 있는데 학생이 없다
약초에 붙은 달팽이만 늘 그자리 걸음이다
산꼭대기로 올라가기만 하는 염소가 있다
물동이를 이고 오던 사람이 가까이서 없어졌다
이 섬엔 시간이 없다
이 섬엔 현재가 없다
이상하다
이 섬에 오면 누구나 이상해진다
배가 두 척 있었는데 밧줄을 당기니 배가 없어졌다
해변에 조약돌이 수천억인데 집으려 하면 없다
이상하다
(125) 전화와 시
전화다
"경기도 오산에 사는 김아무갠데요 시집을 읽다 그 시를 쓴 사람을 확인하고 싶어서 걸었어요.지금 전화 받는 분이 그분인가요? 편지를 써도 되고 만나뵈도 되나요 그 사람 어디 가야 만나죠 늘 섬에 간다던데"
"네. 되죠 그 사람이 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섬이 그 사람에게로 오는 거죠
그 사람은 섬이 된 지 오래요 만나려거든 섬으로 가세요"
수화기 속에서 파닥이는 갈매기 소리가 그 사람의 시요 그 갈매기가 그 시를 쓴 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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