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전라도

순천만기행 -선택의 기로-

맑은 바람 2008. 9. 17. 22:37

 

2007. 10. 25-26


 남편의 고교동창생 부부 세 쌍이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6명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두 남자는 운전을 하고 한 사람은 스케줄 짜고 회계를 맡기로 하고 두둥실 고속도로를 내달았다.

주말은 바쁜 사람, 젊은 사람들에게 내주고 나이 들고 시간 있는 이들은 평일여행을 해야 된다는 중론에  따라 목요일에 출발해서 금요일에 돌아오는 여정을 잡은 것이다.

 일기예보에는 양일간 남부지방에 계속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날씨 때문에 뒤로 미루자거나 그만두자는 얘기는 아무한테서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여행을 즐기는 이들은 비오는 날은 비오는 대로 화창한 날은 또 그대로 좋은 법이니까--


 일찍 집을 나선 덕분에 점심 무렵에 춘향의 고장 남원에 닿을 수 있었다.

남원에 왔으니 당연 추어탕을 먹어야지 하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관광버스들로 붐벼서 마땅히 차 댈 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차 대기가 좋은 곳 중 아무 데서나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비교적 자기주장들을 자제하며 상대방 의견에 따르자는 분위기여서 그러려나 보다 했다. 그때 고집스럽게 꼭 남원에서 제일 맛있는 집으로 보이는 델 찾아가야 한다고 우기는 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차에서 후딱 내려 우쭐우쭐 앞장서서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가더니 그럴 듯한 집을 찾아냈다. 다리품을 팔고 근방을 몇 바퀴 돌기는 했지만 제대로 찾은 것 같은 예감에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예상대로 꽤 맛이 좋은 집이었다. 서울에서 먹어 보던 것보다 좋다고들 했다. 나는 미식가가 못돼서 남들이 맛 있다 맛 있다 할 때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며 진짜로 맛있는가 보다 한다.

 

 점심 후에 광한루원에 들러 완월정을 보고 오작교를 건너고 광한루를 바라보며 또 합환주를 나누었다는 퇴기 월매의 집 사랑채를 들여다보며 이몽룡은 어쩌면 단순히 노리갯감으로 그네 타는 춘향이를 불렀을 텐데 열여섯 춘향의 당차고 심지 깊은 마음씨에 끌려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남원 광한루 앞 오작교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사이를 헤치고 선암사와 송광사를 둘러보았다.

한때는 신선과 선녀가 노닐었을 법하게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선암사 승선교를 건너고 강선루를 지나 절 안에 드니 잠시 비는 멈추고 붉노란 숲의 품에 절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묵묵히 절을 지키는 수백 년 된 상수리, 동백나무들과 대웅전과 요사채를 둘러본 후에, 대나무 통을 타고 좔좔 쏟아지는 석간수에 목을 축이고 돌아서 나오다가 그만 봐서는 안 될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담 밑에 깨진 기왓장더미가 수북이 쌓였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기왓장마다 흰 글씨가 보였다. 소망과 사람들 이름이 적힌 기왓장들이 무참히 깨져 있었다. 얼마 전 이 절에서 스님들끼리 한바탕 소란스런 일이 있었다더니 그 깨진 기왓장들이 그들의 분쟁의 원인을 소상히 일러준 셈이다. 나도 여행 다니다가 기와불사가 있는 데서는  꽤 여러 번 시주를 하며 기왓장에 소망과 이름을 적곤 했는데-- 부처님은 이들을 어떤 눈으로 내려다보셨을까?


 법정스님의 체취가 배었을 송광사에 닿았을 때는 사방이 어둑어둑해져서 좀 서둘러 절을 한 바퀴 돌았다. 장엄 그 자체의 무게에 눌려 다소곳한 자세로 조용히 그러나 종종걸음으로 대웅전 앞에 잠시 머무르다가 산신각 옆을 지나 해우소로 향했다.  무슨 찻집 입구에나 있을 법한 해우소 입구의 멋진 아취형 장식은 어쩌면 송광사의 명물일지도 모르겠다. 볼일이 없어도 꼭 들르고 싶은 곳이 바로 송광사의 이, ‘근심을 푸는 집’이다.

 절집을 뒤로하고 차는 후리후리한 가로수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한참 달려 보성 땅에 들어섰다. 저녁식사를 위해 인터넷으로 이미 물색해놓은 전라도 한정식 전문집을 찾아들었다. 교자상 그득히 스무 가지가 넘게 반찬이 나왔으나 그저 무늬만 전라도 한정식이지 이미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향토음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녁 식사 중에 오늘 묵을 숙소를 알아보았으나 마땅한 데가 없고 비도 주룩주룩 오는데 가까이에 있는 숙소로 가자는 남자들의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규모가 작은 읍에 모텔들만 몇몇 있을 뿐이었다. 모텔의 이미지와 그 후줄근한 커텐이 흐느적거리는 주차장 정경이, 여자들로 하여금 선뜻 동의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정네들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마님들의 소리 없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에 눌려 차를 몰아 숙소 물색에 나섰다. 율포 해안까지 가보았으나 시골 구석구석 눈에 띄는 것이라곤 모텔뿐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길을 잃고 한동안 서로 찾느라 애쓰다가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곳을 발견했다.

 한적한 곳을 지나가다 보니 언덕 꼭대기에 팬션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황토를 바른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신축건물이다. 실내조명을 형광등이 아닌 백열전구를 써서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고 거실과 내실 통유리 밖으로 내다보이는 먼 길 위의 풍경들이 애잔하게 아름다웠다.

 하룻밤인데 뭐 아무데서나 자면 어때 라고 누군가 속으로 외쳤겠지만 잠시 귀찮고 힘들더라도 이왕이면 맘에 드는 델 찾아 기분 좋게 그리고 추억에 남는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진미가 아니겠는가.

 

                          골망태 팬션

 

 이튿날 아침 황토방에서 숙면을 취한 덕에 개운한 몸으로 일찍 서둘러 보성차밭으로 향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한 사람의 계획성 있는 삶이 훗날 이렇게 보성을 차밭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내외국인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있으니 지혜로운 한 사람이 어리석은 수만의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보성 차밭

 

 

                                    향기가 매우 강한  차꽃


드디어 순천만-

‘와온의 저녁’이라는 시를 접하면서부터 오고 싶었던 순천만-

참 짧지 않은 생을 살아왔건만, 그리고 여행도 남 못지않게 많이 했건만 아직도 가보지 않은 명소들이 우리 땅에 수없이 널려 있다. 불확실한 내일 속에 확실한 오늘만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과 뜻만 있으면 아무 때고 주저 없이 떠나리라 맘먹는다.

‘순천만 갈대축제’가 한창이라 아침부터 관광버스들이 속속 도착하고 행사장의 요원들이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고들 있었다.

                       순천만 갈대 축제

 

어제와는 달리 씻은 듯 맑게 갠 하늘 아래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고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70만평)을 바라보니 속이 확 트이고 몸이 저절로 가벼워온다.  친환경적으로 늪 위에 설치해 놓은 나무 데크를 따라 갈대밭으로 들어갔다. 유치원 꼬맹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물 빠진 갯펄(800만평)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생물들(농게, 칠게, 짱둥어--)을 발견하곤 소리 소리를 질러댄다. 생명의 환희다.

                            짱뚱어를 관찰하는 갈대밭 꼬마들

 

                           갈대와 인파

 

갈대밭이 끝나는 곳에 용의 형상을 닮은 산(용산) 하나가 떡 버티고 있다.  일행은 잠시 머뭇거렸다.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는 사람도 나오고 가나 마나 뭐 볼 게 더 있겠느냐며 웅얼거리는 사람도,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사람도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서 여기까지 다섯 시간 이상 걸려 왔는데 여기서 돌아서면 되겠느냐며 단호한 걸음으로 앞장을 선다. 옳거니! 하며 나도 뒤를 따랐다. 곧바로 나는 일행의 선두가 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단풍 숲속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행여 뒤에서 이제 그만 돌아가지 하는 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챌까봐--


산을 넘어 전망대에 이르자 광활한 갯벌과 바다가 한눈에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사진작가들이 필름에 담는 광경이 바로 거기 있었다. 일행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 올라와 보지 않았더라면 순천만 왔다 가나 마나였을 거라고. 앞장을 섰던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용산 조망대에서 내려다본 순천만

 

                                         조망대에서 바라본 S라인의 해안선

 

                         칠색초

 

산을 내려와 선상투어에 올랐다. 탐사선을 타고 산 위에서 보았던 S선 물길을 물보라를 일으키며 헤쳐 나갔다. 산 위에서 조망할 때 볼 수 없었던 작은 생명들-갯벌 위로 새까맣게 올라와 두 눈을 대굴대굴 굴리는 칠게, 여기저기 한 마리씩 외톨이로 서서 긴 부리로 먹이를 찾는 도요새, 긴 다리와 목을 한껏 빼고 탐사선을 유유히 바라보는 검은 머리 흑두루미 떼,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넘어가는 해를 향해 웅기중기 모여 앉은 청둥오리 떼-

                         와온의 노을

 

                                                                  


 귀로의 차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던 여러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문득 귀찮은 생각에 또는 게으름의 유혹에 빠져 주저앉았더라면 그 순간을 넘어선 사람들만이 누리는 보다 값진 열매를 이내 맛볼 수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