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반,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다. 작은눔은 오늘 수능시험 접수를 해야 한다기에 놔두고
세 식구만 차에 올랐다. 막내삼촌 차를 하루 쓸 수 있게 되었다. <망향휴게소>에 닿으니 일곱 시가
다 되 가고 있었다. 중노동(?)을 할 예정이므로 국수보다는 밥이 좋다며 육개장을 시켜 속을 든든히
채우고 호죽면 선산을 향했다.
얼마 전에 제초제를 미리 뿌려놓은 덕분인지 풀이 그리 무성하지는 않았다. 시어머니 산소 앞에
큰절 올리고 잠시 뒤 세 사람은 제각기의 할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예초기를 둘러메고 풀을 깎기
시작하고 큰애는 갈퀴로, 깎은 풀들을 모아 한쪽으로 쌓아놓고, 난 호미를 가지고 무덤 위 여기저기
자라는 잡풀들- 이를테면 질경이 등을 파내고 깊이 뿌리내린 것들은 도끼로 찍어냈다.
이른 아침이라서인가 모기떼가 극성이었다. 얼굴에, 팔에 등판에 닥치는 대로 달려들어 마구 찔러댄다.
여기저기 벌겋게 부어오르고 미치게 가렵고-- 세 사람은 모기떼로부터 도망 다니며 일을 할래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준비성 없는 내 자신의 귀퉁배기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다. 내년엔 모기퇴치 밴드
랑 살충제, 버물린을 꼭 챙겨가지고 와야지~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소리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발이 척척 맞게 분업한 끝에 마침내 시어머니,
시조부모님의 산소가 멀끔한 모습을 드러낸 건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기분이 날아갈듯 했다.
그이나 큰애는 더 그러했으리라. 만약 돈 주고 사람을 사서 일을 했더라면 육신은 편했을망정 이런
노동 후의 보람과 자랑을 어떻게 맛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머잖은 날에 예초기는 전문 일꾼들의 손에 넘어갈 게고 후손들은 성묘를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고
그러다가 또 얼마 뒤에는 아예 이장을 하고 납골당을 짓고 또 머잖은 날 손자손녀 대에 가서는 이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 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리라.
모두들 지금 당장 발등의 불을 끄며 살기도 바쁜데 누가 돌아가신 이를 추모하며 그리움을 이야기하겠는가.
그저 당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도리를 다할 뿐이다.
(2008. 9. 5 금 쾌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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