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8일--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책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께서 사주신 “신비 시리즈” 였습니다.
열권 정도 되는 책이었는데 동물의 신비, 식물의 신비, 인체의 신비, 지구의 신비, 등등
자연과학에 관련된 얘기들을 만화로 엮어서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 놓은 책이었어요.
화장실에도 책을 들고 갈 정도로 책을 좋아했고,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똥을 누면서도 책을 읽던 절 보고 “책이 그리 좋으니?”라고 물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책의 두꺼운 하드커버가 나달나달 해질 정도로 책읽기를 좋아했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저를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판사나 검사가 되거라 라고 하셨었지요, 전 그게 뭐하는 건지도 몰랐던 터라, 전 과학자가 될거에요 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대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던 중,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던 안양에서 서울의 반포로 이사를 왔습니다.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안양은 시골이었던 터라 개천에서 뛰놀던 저를 깍쟁이 서울 친구들이 쉽게 받아들여 주진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 나는 게, 당시 저한테 냄새가 난다고 서울 깍쟁이들이 안 놀아 주더군요. 차차 서울 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들도 사귀기 시작 했던 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니까 시골냄새가 빠지는데 거의 2년이 걸렸네요.
그런데도 전 그 2년이라는 시간동안 “외로움”이란 감정은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전 개구쟁이였고, 집에 오면 아파트 앞 공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무릎이 까지도록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 친구들도 막 서울로 이사온 저랑 같은 냄새가 나는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게는 “책”이라는 평생지기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친구들에게 칼세이건 박사의 Cosmos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신부님 책장에서도 COSMOS를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책장 거의 맨 아랫칸에 고이 모셔저 있었습니다) 칼세이건 박사는 드넓은 COSMOS로 저를 안내해 준 고마운 분입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의 세계관이 첨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영세를 받은 이후,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안정적이고 따뜻한 세상과 “절대적 진리”라는 세계관이 칼세이건 박사가 제시하는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상대적 진리”라는 세계관과 충돌! 당시의 어린 저에게는 “양립불가”한 대상이었고,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은 두 세계관이 어느 한쪽이 맞고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고, 두 세계관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는 “차별”이라는 새로운 난제를 만났습니다.
가난한자와 부자가 존재하고, 배운 자와 못배운 자가 존재하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존재하고, 아주 피곤했습니다. “뭘 그리들 구분을 하려고 저리들 발버둥을 치나”라는 생각과 촘촘히 엮어진 “차별”을 위한 제도들을 보면서 참 많이 고민되고 걱정스러웠습니다. 난 어디쯤에 서야 하는지, 세상과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순응해야 하는지... 갑자기 준비도 안 된 저에게 세상은 당장 답변을 요구하는 것 같았어요.
군대에 들어가면서 “차별”이라는 주제는 점점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게 현실을 보여줬습니다. 전 TV속에서만 보던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자고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볼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건 “차별”을 극복하려던 것이 아니고 그냥 차별적 구조의 윗자리를 차지하려던 노력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십여 년의 고시생활을 거쳐 결국 고시에는 실패를 했습니다. 고시를 접으면서 참 많이 힘들었어요. 인생에 실패한 것 같았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 같았고, 그냥 실패자로서 인생을 사는 건가 라는 자괴감도 들었고, 엉망진창이었죠.
모든 걸 접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덕유산 깊은 산골에서 절 맞아주신 분은 황인찬 신부님이었습니다.
그 분께 목수일을 배워가면서 전 제 맘 속에 자라나던 미움, 욕심, 질투를 알게됐고 지금은 미움과도, 욕심과도, 질투와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산 후 게스트하우스를 열었고, 2016년 현재 세계각국의 여행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제 꿈을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새롭게 화두로 떠오르는 “공유경제”에 전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물론 기존의 경제체제와 많이 다르고 과거 “세계화”라는 이념이 거대자본의 시녀로 전락했던 것처럼 공유경제도 세계화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회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할 거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이 그 희망에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어 줄거라고도 믿습니다.
AIR B&B의 창업자는 뉴욕의 가난한 화가 였습니다. “자신의 작은 보금자리를 타인과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또 좋은 경험을 나누자”는 “깜찍한 아이디어”는 세상의 많은 사람을 열광 시켰고 지금은 힐튼그룹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구멍가게 수준의 게스트 하우스이지만, 숙박업이 기술과 그리고 나눔의 철학과 만나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타인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착한 상인”이 될 겁니다. 그리고 착한 상인들이 많은 “착한 경제”를 만들어 보고 싶은 바램도 있습니다. 지금의 “천민 자본주의”는 너무 천박하잖아요!!
제 이런 바램과 희망을 함께 나눌 사람을 만나 그 시작을 하는 자리에 신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과 애정 어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2016년 6월 8일 프란치스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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