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 30분 전.
서서 기다릴까 앉아서 기다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경복궁 3번 출구 앞 <카페베네>로 들어간다.
화이트 모카 한 잔을 시키고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토요일 오전의 한산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도로는 오가는 차들로 붐빈다.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한 여자애가 치마를 나풀대며 바삐 횡단보도를 건넌다.
순간, 지난 세월 속에서 아쉽고 조금은 후회되기도 하는 일들로 인해 얻어진 별명이 떠오른다.
<지각쟁이>
아직도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몇몇 사건들-
(하나)
창경초등학교 3학년 때- 교복착용을 실시한 첫날-반코트 길이의 면직물로 된 깜장 색인데 하얀 칼라에
앞판에 빨간 테를 둘러 산뜻하고 예뻤다. 한껏 부풀은 기분으로 새 교복을 입고 등교했는데 나보다 먼저
온 애들이 지각이라며 교실 뒤에 웅기중기 서있다.
나의 入場을 끝으로 선생님은 “일렬로 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스타일 완전히 구겼다.
효제초등학교 1학년 남동생과 8살 아래 귀염둥이 막내여동생과 교복입은 나
(둘)
고 1 학기 초였다.
우리는 다른 반보다 한 시간쯤 일찍 등교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의 학급운영방침에 따라-
호랑이 과부 선생님은 이미 교탁 앞에 험상궂은 얼굴로 앉아 계셨다.
내 자리는 맨 앞 가운데에 있어 뒷문으로 들어가자면 千里 길이다.
에라, 모르겠다.
앞문을 사르르 열고 발뒤꿈치를 든 다음 크지도 앉은 몸을 최대한 낮춰 살금살금 자리로
간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선생님의 따가운 시선을 등으로 느끼며-
자리에 착석하기가 무섭게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그래 가지고 넌 성적도 꼴찌나 할 게야.”
난 억울했지만 고개를 책상에 박고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셋)
지금도 그때 일을 이야기하면서 ‘도저히 못 말리는 사람’ 소리를 듣는 일-
방학 중 어느 날 가까이 지내는 선생님들과 <삼부연 폭포>로 놀러 가기로 했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다가 떠난 모양이다.
잠시 당혹스러웠으나 그냥 돌아서서 집으로 갈 수는 없는 일-
택시를 탔다. 삼부연 폭포에서 가장 가까운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막상 택시를 타고 보니 지갑에는 만원 남짓 들어 있었다.
메타가 돌아갈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방향을 잡고 폭포 쪽으로 향했다. 어쩌다 개울로 내려가서 걷고
있는데 저만치 둑길 위에 낯익은 모습들이 웅성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김선생니임-”
나는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 부르듯 울먹거리며 고함을 쳤다.
저들은 나보다 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었다.
내가 개울에서 둑 위로 올라서자
“개천에서 龍 난다더니, 진짜네!” 하며 깔깔거렸다.
참으로 無謀한 시절이었다.
이제는 쫓길 일도 없고 약속 시간 임박해서 가는 일이 나 자신 짜증스럽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출발시간을 일찌감치 잡아놓고 외출복도 미리 갈아입고 있다가
집을 나선다.
이제는 내가 그들을 기다려줄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