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를 알면 인문학이 보인다/김상근지음
지인이 갑자기 피렌체를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누군가가 책 한 권을 소개하더란다.
이 책을 읽고 가니 아는 만큼 보이더라고, 그래서 여행이 더욱 의미 있었다고.
책 제목을 듣는 순간 느낌이 왔다.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기 사작했다.
읽은 때:2019년 11월24일~11월29일
***이 책을 읽으면서 감상문을 가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싹 없어졌다.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 흥미진진한 지식의 숲속으로 들어온 느낌-- 筆寫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내가 만일 피렌체에 태어났었으면 취미와 돈이 되는
필경사가 딱 내게 알맞은 직업이었겠다.
그런데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는 그 어느구석에도 여성직업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누구의 부인' 정도로만 등장하고 변변한 연애사건조차도 없다.
남자들끼리 동성연애 이야기는 사건으로 취급하지도 않고 종종 등장한다.
촤근에 읽은 <영국사 산책>에서도 그렇고 그 옛날부터 동성애는 보편적인 사건(?)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오늘날 유행하는 일인 줄만 알았다니~~
[14세기의 길 비아 트레첸토]
4세기~14세기초반 중세 암흑시대
*피렌체의 성벽 재건축--1284년 토스카나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성벽확장공사를 했다 이때 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을 치타디노라 했다.
이들 시민의 사상적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르네상스가 태동됨.
*왜 하필 피렌체인가?
기벨린당과 겔프당의 각축전--
즉 프랑스의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하던 교황 지지파의 겔프당과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주도권을 인정하는 황제지지파 기벨린당의 대립과 갈등
이탈리아에서는 신흥상인계급이 주로 겔프당, 귀족 가문이 기벨린당으로 갈리었다.(쌈박질은 인간의 특권! 써니)
이때 농노제도의 폐지, 값싼 임금노동자의 증가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겔프당의 세력이 커졌으나 이들이 다시 길드(시민상공업자들의 자치경제조직이자 피렌체 정치행정의 주체)를 조직, 새로운 세력을 키움.
피렌체는 도시의 모범,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워갔다.그를 위해 벽돌의크기와 색깔까지 법으로 규제함.
1.단테의 길
단테는 겔프백당(교황권개입,외부의 정치적 영향력 결사반대)의 귀족.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이자 14세기 르네상스의 문화사적 지평을 연 인물, 즉 이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산타 트리니타 다리: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던 다리
*두오모:'하느님의 집' 각 도시의 주성당을 가리킴
겔프백당대표로 로마에 와있는동안 겔프흑당이 권력을 장악,단테집안은 한순간에 반역자의 집안으로 몰려 재산을 압수당하고 벌금없이 피렌체로 돌아가면 화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다른 책에서는 왜 단테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21년 동안 유랑하면서 토스카나 방언으로 쓴 <신곡>은 '유랑자를 위한 장엄한 미사곡인 동시에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찬미가가 되었다.'
단테는 베로나를 중심으로 긴 유랑생활을 하다가 1321년 56세의 나이로 라벤나에서 사망한다.
2.페트라르카의 길
페트(1304~1374)는 시인이자 성직자이며 수사학자였다.
유려한 라틴어로 고대사상을 부활시켜 본궤도에 올려놓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의 선구자다.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법학공부를 했으나 그가 원하는 건 고전문학 탐독과 글쓰기였다.
그를 위해 그는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해주는 성직에 몸을 담았다.
1341년 4월 로마의 시 경연대회에서 최고시인 월계관을 쓴다. 그 후 산정상(플랑드르지방의 몽방투)에 올라, 가시적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인간내면 세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때 이탈리아에 흑사병 만연(14세기 중엽)*영국은 1664-1665년에 흑사병 만연.
페트는 교황의 외교사절로 활동 중 평생지기 보카치오를 만나 단테로부터 시작된 피렌체 인문주의의 계보를 잊는다.
페트는 유부녀 라우라를 만나 그녀를 정신적 연인으로 받아들여 그의 문학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페트가 추구했던 인간상: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선한 존재가 되는 것--그 답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라 고전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는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에게서 답을 찾았다.
3.보카치오(1313~1375.12.21)
*14세기 피렌체 3대 문인: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
보카치오는 단테를 피렌체에 환기시키고자 숱한 강연을 한다.
*피렌체에 흑사병 만연(1347~1348)
이때 보카는 <데카메론>을 집필한다. 배경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외곽의 빌라로 피신한 젊은 남녀들의 재담
*또다른 배경(?)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흑사병의 만연으로 종교의 위세가 한풀 꺾임.
한때 피렌체 인구의 3/4이 줄었으나 1470년부터 병이 잦아들면서 15세기 이탈리아는 경제가 부흥한다.
죽음의 실체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지내야한다는 생각들이 만연했다.
중세시대엔 인생을 즐기려는 생각자체가 종교적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보카치오는 자신의 생전 업적을 부정하고 종교적 인물이 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나보다.-써니)
4.조토(1267?~1347)
작가의 글은 화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의 시각적표현에 영향을준다
단테의 정신을 부활시켰던 보카치오가 '인곡'(데카메론)을 글로 썼다면 조토는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화의 거룩함을 떠나 인간의 고뇌하는 모습을 그림--산타 크로체 성당의 바르디 체플 프레스코화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밝혀진 것이 많지 않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영항을 끼친 것만은 확실하다
불후의 명작:스크로베니 채플의 프레스코 연작/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성당(꽃의성모성당)의 종탑 설계(조토의 종탑)
***산타 크로체 성당:단테, 브루니, 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키아벨리,갈릴레오 갈릴레이등의 무덤이 있다.(피렌체가 낳은 르네상스의 천재들)
[15세기의 길 비아 콰트로첸토]
--15세기는 르네상스의 백가쟁명기
1.부르니의 길
부르니(1369?~1444)
<피렌체찬가>, <피렌체시민사> 를 통해 르네상스의 출발점이 피렌체임을 알림.
교회의 분열기에 교황의 비서로 근무했으므로 그 내면의 어두운 실상을 목격했음에 틀림없다. 모시던 교황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비서자리를 잃었지만 <피렌체시민사> 저술의 공로를 인정받아 피렌체정부의 제1서기장이 된다
**베키오 궁전:
메디치가문의 저택--메디치정부청사
부르니는 코시모 데 메디치 가문과 알비치 가문 사이에서 널뛰기를 했다.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이 흥미진진한 이유--역사적 사건들도 흥미를 끌 수 있지만 내겐 인물사가 더 흥미롭다.
더구나 이야기 전개방식이 소설적이어서 긴장감마저 더해준다. 저자의 남다른 솜씨임에 틀림없다--써니)
**부르니가 추구하는 인간상:'활동적인 인간'
그 본보기로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 단테를 꼽았다.
2.알베르티(1404~1472)
볼료냐대학에서 법학 전공.
1430년부터 로마교황청 법률비서로 30여년간 봉직.
다방면에 박식하여 회화, 조각 건축에 관한 저서를 내고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루첼라이 저택을 지었다.
--후에 루첼라이 가문은 메디치가문을 섬기는 가신이 되었다.
(유럽의 건축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 15세기에 이미(아니 그 이전부터일 수도)도시미관을 고려해서 공공건물, 귀족가문의 건축물, 서민의 집을 짓는, 건축학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우리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써니)
*선원근법을 브루넬레스코와 함께 개발한 알베르티는 서양미술사의 빛나는 인물
(돈이 돌아야 전쟁도 하고 예술도 발전시키는데 식민지도 없고 무역도 제대로 하지 않은 조선이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었을까?-써니)
*알베르티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조화로운 상태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규칙적인 상태
3.브루넬레스코(1377~1446)
금세공사,
*피렌체의 흑사병:1400년, 11000명이 죽음
피렌체의 재앙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은 작품(성 세례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에 응모했으나 낙방, 로마로 돌아가 고대의 건축(판테온)술을 연구한다.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은 원근법의 수학적기초를 밝혀낸다. 그리고 세계최초의 고아원'선한자를 위한 휴식처'로지아를 세운다.(이를 두고 학자들은 죄초의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이라 했다.(그런데 내눈엔 피오레성당이나 고아원건물의 인상이 스페인에 있는 아랍인의 건축양식과 닮아보인다)
브루넬의 최대 역작은 피렌체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고 있는 '브루넬의 돔'(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성당)으로 서양건축사 전체에서 걸작으로 간주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브루넬은 후에 이곳에 매장된다
성당의 돔엔 벽돌 400만 장을 썼다.(지상에서 돔꼭대기까지100m, 돔의 지름이45 m)
*브루넬이 건축한 대표적 작품:
산 로렌초 성당(메디치가문의 가족성당)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장식이나 건축자재로 쓰는 방식
브루의 말년의 회심작:산토 스피리토성당(1435~1484)
이 안에 미켈의 작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있다
*파사드:'정면'이라는 뜻, 건물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부분.
4.도나텔로(1386~1466 )
유럽 근대조각의 아버지.
대리석<다비드> <성요한의 좌상> <청동다비드> <유디트>1455~1460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
<추코네>하박국 선지자의 대리석 전신상 *추코네(왕대가리)
목각<막달라 마리아>
도나텔로의 걸작:피오레성당의 대리석 찬양대 <칸토리아>
도나텔로의 최후작: 청동설교단<부활과 수난의 제단>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훌륭한 작품 활동을 함
코시모는 유언으로, 도나텔로가 죽으면 자기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
도나텔로의 스승은 로렌초 기베르티, 브루넬은 친구.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브루넬에 의해 원근법의 원리 터득, 선윈근법을 르네상스 조각에 접목시킨 최초의 인물
도나텔로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성당>의 내부조각을 담당했다
고대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르네상스식으로 재현, 삼차원적 입체감까지 더함
그러나 건축가 브루넬은 조각면에서도 도나텔로를 능가했다.
그 예로<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있다.
5.마사초(1401~1428)
로마에서 죽었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음 (그림 하나하나가 넘 도발적이어서 어떤 집단의 미움을 사 제거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써니생각)
**피렌체의 3인방
건축가 브루넬레스코,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마사초
마사초의 대부분의 작품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랑카치 채플에 프레스코화로 남아있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중세신약에서 아담은 예수, 이브는 성모마리아
<세금을 바침>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 <자선을 베푸는 성베드로와 성요한>
<그림자로 병자를 치료하는 성베드로> <성삼위일체>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그림
[아르티스티 미노리의 길]
'마이너 리그 예술가'라는 뜻
1.기베르티
평생 두 개의 청동문짝(성 세례요한 세례당)과 세 개의 조각상만 만들고 죽은 사람(지금 우리는 3,4층짜리 빌라 한동 올리려면 고작 몇 개월이면 충분한데, 성당 문짝 하나에 20년의 세월이라니~)
동쪽 청동문 20년, 북쪽 청동문 27년-'천국의 문' (진품은 두오모박물관에~)
오르산 미켈레 성당외벽을 장식한 조각상은 <성 마태><성 스테판> <성 세례요한>이다.
그의 유해는 산타크로체에 안장됐다.
2.프라 안젤리코(조반니 디 피에솔레신부)
그의 작품은 산마르코 수도원 박물관에 있다
<수태고지> <나를 만지지 말라> <희롱당하시는 그리스도> <최후의 심판> <성자들과 함께한 성모와 아기예수>
3.미켈로초(1396~1472)
코시모 메디치가 등용한 건축가이자 조각가. 기베르티의 문하에서 배움.
코시모가 베네치아로 망명했을 때 환대해 준 베네치아공국에 감사의 표시로 작은도서관을 짓는데 이 일을 맡은 이가 미켈로초다. 귀향 후 가문의 저택도 미켈로초가 맡는다.
당시 유행하던 탑상주택에서 벗어나 팔라초 건축 양식을 택한다.
'메디치 리카르디 저택'이 바로 그것이다.(1444~1469년 완성)
그밖에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사를 위한 도서관 실내건축'이 미켈로초의 대표작이다.
그는 산마르코 수도원에 잠들어 있다
4.우첼로(1397?~1475 )
우첼로는 '새'라는 뜻인데 그가 새그림을 좋아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우첼로도 메디치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존 호크우드 경의 기마상>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벽면 <시계> <투시법으로 그린 성배>
<산 로마노 전투>가 우첼로의 대표작
5.델라 프란체스카
초기에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와 주로 활동, 그의 조수로 성당 프레스코화를 그림.
조화와 비례의 원칙 중시, 미술의 수학화를 선도, 화가이며 미술이론가
<다섯가지 규칙적인 형태에 대한 노트> <그리스도의 세례> <여섯 명의 성자와 함께있는 성모자>
*<수난받는 그리스도>대표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부부의 초상화>피렌체에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
(과거 영국왕들이나 중세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금 서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갸름한 얼굴, 얇은 외까풀의 눈,그리 높지 않으면서 기다란 코--그들은 어디서 왔고 또 어떻게 지금과 같은 얼굴이 되었을까?-써니생각)
6.베노초 고촐리(1420 ~1497)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동방박사의 행진>1459~1461
메디치가문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던 피렌체공의회를 기념하는 상징적인 종교화.
7.베로키오
금세공사, 화가, 조각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
제자의 탁월함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음.
낀세대의 주역
베로키오 공방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위에 설치할 청동구 제작에 참여함.
**걸작<의심하는 성 도마> 오르산 미켈레성당 외벽의 조각상(1467~1483)
*<그리스도의 세례> 1474~1475 다빈치와 합작
*메디치가문의 영묘제
**청동 <다비드> 생애 마지막 걸작, 차분한 표현이 특징
베로키오는 산 로렌초 성당 중앙제단 아래 모셔짐
그의 문하생들:다빈치, 보티첼리,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루카,시뇨렐리
***화가들은 그들의 모든 행복을 베로키오의 샘에서 퍼왔네.
베로키오는 이탈리아도시에서 오늘날 이름을 날리는 모든이들을 제자로 두었으므로
8.기를란다요(1449~1489) 금세공업자의 집안에서 출생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나 미켈란의 무시를 당함.
예술의 온고지신을 이룩했던 화가
**베스푸치 가문의 주문을 받고 제작한 오니산티 성당의 작품들:<최후의 만찬> <성 제롬> <자비의 성모>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1483
교황의 초청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벽면에 그린 프레스코화(미켈란의 천장화 때문에 빛을 잃음)
**<수도회칙을 승인받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산타 트리니타성당의 프레스코화, 기를란다요가 남긴 최고의 걸작'.
**만년에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중앙제단화를 제작함. 사망 후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안치됨
9.다빈치(1452~1519)
시대를 앞서갔던 만능인.
피렌체 빈치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 피렌체로 이사온 후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간다.
준수한 외모, 왼손잡이,관찰과 사색을 좋아함. 기록의 생활화.
다빈치는 20세에 베로키오공방에서 도제생활을 끝냄.
그러나 사생아에, 동성애자라는 혐의까지 받은 처지라 메디치가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수태고지>우피치 미술관소장
<브누아 성모자상?>에르미타 주박물관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화>미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성 히에로니무스>영국 내셔널 갤러리 소장
<동방박사의 경배>산도나토 수도원의 제단화/미완성작품
<암굴의 성모>루브르박물관 소장
다빈치의 치명적인 약점은 상당수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는 점이다.그 이유는?
로렌초의 소개로 다빈치는 밀라노의 통치자의 가신이 된다.
밀라노에서 제작한 작품: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의 기마상> <최후의 만찬>
--다빈치의 '대기원근법'(눈으로 보이는 사물의 테두리는 실제 사물처럼 선명하지 않으며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더흐릿해진다는 원리)은 사물을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의 기초를 완성시켰다.
<모나리자> <어느 수염 난 노인> (다빈치의 자화상?) <성 세례요한>
노인이 다 되어 머물자리를 찾지 못한 다빈치는 프랑스에 가서 죽는다.
10.라파엘로(1483~1520)
부친이 금은세공사로 페데리코 가문의 궁중예술가였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이는 피에트로 페루지노였다. 스승을 무시했던 미켈란에 비해 라파엘로는 겸손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성모의 결혼식>밀라노 브레라박물관 소장
라파엘로는 로마총독부부의 추천서를 들고 피렌체 유학길에 오름.
라파엘로는 피렌체 출신이 아닌 이유도 있고 해서 피렌체에서 그리 대접받지 못했으나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생애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바티칸 서명실의 그림:<성만찬에 대한 논쟁> <아테네학당> <보르고의 화재> <변화산상에서의 그리스도>
그의 그림은 고상하고 우아한게 특징
우피치미술관: <방울새의 성모>1505
**방울새는 수난(예수가 쓰게될 가시면류관)을 상징
이 작품이 있던 로렌초 나시집이 무너지면서 17조각이 났으나 우피치미술관의 노력으로 원상대로 복원.
*피티궁전박물관: <<대공의 성모> <의자의 성모>1514-1515 <도니부부의 초상화>(도니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라파엘로는 사실주의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인물을 묘사했다.
*우피치미술관 소장:<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1517 메디치가문이 배출한 교황과 그의 친척인 추기경들의 모습
*피렌체박물관 소장: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 <레오10세와 추기경들> <의자의 성모>
그의 시신은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
**르네상스 3대 거장:미켈란젤로, 다빈치(또는 티치아노),라파엘로
[메디치의 길]
--모든 르네상스의 길은 메디치의 길로 통한다. 메디치가문의 역사는 350여 년으로 끝난다.
가문의 근본출발은 한미하기 그지없었으나 가문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피렌체의 군주가문,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한 종교 명문가, 프랑스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한 정치 명문가, 유럽의 모든 왕실과 사돈의 인연을 맺는 가문으로 등극한다.
*르네상스를 일으킨 가문의 수장들:
1.코시모 데 메디치: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나라의 아버지'로 불림
2.로렌초 데 메디치:'위대한자' 신플라톤주의를 소개, 새로운 사상의 창달자 역할을 함.
1;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국부로 불림, 메디치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 받는 인물
모직업과 은행업으로 성공.(1400년경)
부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가문의 경제적 기초를 놓은 인물
피렌체 은행본점을 설치한 1397년이 메디치가문의 영광이 시작된 원년(1392년 조선건국)
조반니는 한번 맺은 사람과의 인연을 끝까지 이어갔으며 신용과 믿음을 중시하던 은행을 대대적으로 성공시킴.
**조반니의 가르침--가능하면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
그 교훈을 삼을 만한 것이 '치옴피의 반란'1378(피렌체의 민중폭동)-'치옴피'는 길드에 가입할 수 없는 단순노동자를 가리킴. 반란을 통해 처우가 개선됨
조반니는 자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피렌체시민의 존경을 받았으나 경쟁자들은 이를 시기하고 경계함.
메디치 저택이 작은 규모와 검소한 외부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는 '메디치 리카르디 저택'으로 불린다.
이 건물 안에서 당나귀를 타고 있는 코시모의 그림이 있는<동방박사의 행진>을 볼 수 있다.
'베키오궁전'은 코시모가 피렌체 대공으로 등극한 후 개조된 집
코시모1세는 나폴리왕국의 공주였던 엘레오노라와 결혼,재건축한 피티궁전에살다가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빨아들이는 책--화장실에도 가고, 슈퍼에도 가야 하는데 놓아주지를 않는다.-- 써니)
알비치 가문과의 대립, 졸지에 반역혐의로 추방당하나 1년만에 금의환향한다.
아울러 정적이었던 알비치 가문에 대한 보복을 금지시켜 자비로운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1434년 코시모는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자로 공인된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써 동방과 서방의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피렌체의 실질적영주가 누구인지 전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종교적 목적은 실패했으나 동서문화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계기 마련,
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게 함락된 후 그곳의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가 피렌체로 이주.신플라톤주의 시대가 열림.
플라톤아카데미개설, 플라톤의저술을 모두 라틴어로 번역.
르네상스의 진정한 문화충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사상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플라톤아카데미의 운영규칙의 하나: "당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라"
2;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코시모의아들 피에로는 통풍에 시달다 승계를 받은 지 2년만에 죽는다.그뒤를 이어 코시모가 총애하던 손자 로렌초가 실귄을 쥔다. 그가 바로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다.
그는 로마의 세도가 딸과 결혼한다. 그후 '파치가의 음모'로 그의 동생은 죽고 로렌초는 위기에서 살아남는다.
피렌체가 다시 위기에 처했을때 로렌초는 단신으로 평화협정을 위해 적지로 들어간다.
로렌초는 마침내 평화를 찾아 귀향한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자'라 불렀다.그는1469~1492까지 피렌체를 통치하며 르네상스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교황 식스투스4세와 화해한 로렌초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과 뒤쪽벽면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긴다.
**로렌조와 미켈의 만남:
산마르코조각공원에서 조각하는 10대 소년의 재능을 보고 양자로 들여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한다. 동갑내기 로렌초의 아들 조반니는 후에 교황이 되어 미켈은 그를 위해 일하게 된다.
--매년11월7일 메디치의 별장에서 플라톤의 생일에 맞춰 플라톤의 <향연> 재연
<바쿠스의 승리와 아리아나>로렌초의 시집(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카르페 디엠(고대로마시인 호라티우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한국민요)
---만국공통의 생각
"로렌초는 지능이 매우 탁월했으며 생각이 유연하고 사려가 무척 깊었다. 그의 우아함과 상냥함,그리고 친절한 태도는 우리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선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임종을 지켰던 친구 폴리치아노
**우피치미술관:메디치가문의 소장품 전시
**베키오궁전:메디치가문의 거주공간
**산로렌초성당:메디치가문의 가족 예배당
**산마르코성당도서관:1437 전세계에서 모은 희귀문헌과 코덱스를 소장, 전문필경사를 고용, 사라져가는 고대문헌 복원(내가 그 시대에 거기 있었더라면 필경사가 제격일 텐데~)
[플라톤의 길]
**다빈치와 라파엘이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지 못했던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1.마르실리오 피치노
피렌체에서 신플라톤주의가 태동하게 만든 인물/ 코시모주치의의 아들/
1473년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사제서품을 받음
<플라톤전집>1463 유럽에서 최초로 번역된 라틴어번역집
<플라톤신학>1474출간 전18권(기독교신앙과 그리스철학을 극적으로 화해시킴)
2.폴리치아노(1454~1494)
귀족출신의 변호사이며 친메디치가였던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음
피렌체 대학교수/로렌초 장남의 가정교사.
3.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
미란돌라의 영주 가문 출신,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신학 접목에 관심
-폴리치아노와 동성애관계 /피치노의 플라토닉러브 상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
책의 내용이 이단으로 규정되어 체포되었으나 로렌조의 도움으로 풀려남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아랍어에 능통, 폭넓은 학문연구와 독특한 사상체계 구축.
르네상스 정신: 인간의 본성은 존엄하고 인간성은 위대하다.
[보티첼리(1444?~1510)의 길]
염색공의 아들로 태어남, 명석한 두뇌,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을 지님.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의 후원을 받음, 1470년부터 프라 필리포 리피의 화실에서 활동함
<성 아우구스티누스>오니산티성당
<팔라스와 켄타우로스>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렌초를 찬양한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 메디치가문의 지도자들을 동방박사로 등장시켜 메디치 가문 찬양
<유혹받는 그리스도> <이집트인을 죽이는 모세> <이드로의 딸로부터 물을 얻어마시는 모세> <프리마베라>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탄생> 런던내셔널 갤러리
**<비너스의 탄생>보티첼리의 걸작
---피렌체의 방탕과 사치에 직격탄을 날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동받고 전재산을 성당과 수도원에 기부하고 가난한 삶을 영위함. (순수한 보티첼리!-써니)
[미켈란젤로의 길]
본명: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1564 )
6살 때 어머니와 사별, 미켈란집안은 대대로 교황지지파인 겔프당 소속이나 한편 공화당 지지세력이었다.
그는 메디치 집안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살았고 피렌체를 사랑했지만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으로 통치되던 피렌체를 사모했기에 피렌체로 돌아오지 않고 로마에서 임종했다.
피렌체는 미켈란이 살아 숨쉬는 곳
-미켈란을 르네상스와 피렌체를 소개하는 책에서 겨우 한 장분량으로 슬쩍 처리하는 것은 불세출의 천재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다.(김상근)
**르네상스의 길은 피렌체로 통하고 피렌체의 길은 미켈란젤로의 길로 이어진다.
미켈란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예술적 관심을 두게 된다.
<계단의 성모><켄타우로스의 싸움>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의 집')박물관 소장
로렌초의 사망 후 잠시 방황하던 미켈란은 산마르코 수도원장 (도미니크수도회)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서 정신적 스승을 발견한다.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로마교황청과 사치와 허영심에 들뜬 피렌체시민들과 사치와 방탕을 일삼는 지도층의 잘못을 질타하여 그들에게 죄의식과 참회를 촉구했다.
1497, 1498년 시뇨리아광장에서 두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허영의 화형식'을 거행한다.그렇게 잠시 신정정치체제를 유지하던 사보나롤라는 같은 장소에서 화형에 처해진다.(--대중은 쉽게 눈물을 흘리며 선동가의 연설에 감동했지만 그것보다 더 쉽게 그 인물을 불태워죽였다--김상근)
(우리나라 사람들을 냄비근성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건 어쩌면 걸핏하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못난이 근성이 아닌가 싶다--써니)
미켈란은 1494년 피렌체를 탈출, 베네치아로 피신한다.
이때 볼로냐에서 문학작품 창작도 한다.
1546년 작 <단테에게 바친 소네트>가 있다
<잠든 큐피드>가 인연이 되어 로마로 와서 리아리오 추기경과 은행가 야코포 갈리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제작을 시작한다.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 박물관 소장
<피에타>바티칸대성당 소장
***르네상스3대거장의 피렌체귀환:1500년 다빈치, 1501년 미켈란젤로, 1504년 라파엘로
이때 <다비드> 제작(1501-1504) 피렌체 아카데미아에 소장, 미켈란의 대표작
<노예상>네 개는 미완성, <성 마태> 미완성, <피티톤도>미완성. 바르젤로 박물관, <다비드 아폴로>1530 미완성,
<도니톤도>우피치미술관, 템페라로 그린 이젤화
<브루투스>1539-1540 미완성 작품/피렌체 바르젤로박물관---이에 대한 미켈란의 변':조각가는 대리석으로 브루투스를 조각하면서 저질러진 범죄들을 떠올렸고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겨놓기로 했다.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장화>로마에 남긴 걸작(1508~1512)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의 영묘>활동적인 삶을 상징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의 영묘>관조적인 삶을 상징
<메디치 마돈나>1521--1534미완성,
<메디치도서관>미완성, 일명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으로불리는데,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세계각국의 희귀본 소장(세계최초의공공도서관), 미켈란이 설계한 계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으로 불림.
메디치가가 전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를 때 미켈란은 시민반란군편에 가담하여 메디치 축출의 선봉장이 된다.
(미켈란의 일련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볼 때 그 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써니)
<피렌체 피에타>피렌체 두오모박물관 소장/자신의 무덤에 전시할 목적으로 제작
살아생전 피렌체로 돌아가기를 거부, 로마에서 죽었으나 메디치가는 시신을 피렌체로 운구,거대한 장레식을 치렀다.
미켈란젤로의 묘비는 바사리가 제작함. 산타크로체 성당에 안치
<최후의 심판>
[피렌체 르네상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
복잡했던 이탈리아의 정치적환경 가운데 피렌체가 있었고, 21세기 동아시아에는 우리 한반도가 있다.
지형적 유사점 외에 예술적으로 뛰어난 인재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도 이제 피렌체처럼 인류를 위해 무엇인가 공헌할 때가 왔다.
아름다운 미래의 가능성을 만날 수 있는 길은 과거의 아름다운 정신과 먼저 만나는 것이다.
피렌체 도심을 가로지르는 르네상스의 길은 우리가 가야할 오래된 미래다.-저자 김상근의 말
*피렌체의 수호성자:성 세례요한
*피렌체의 상징: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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