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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 이야기/크리스토퍼 히버트

맑은 바람 2019. 12. 10. 20:53

***아래 글은 독서감상문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써머리한 것이니, 나는 책을 읽었다기보다 베꼈다는 말이 맞다.

날이 갈수록, 몇 페이지 읽다보면 앞에 읽었던 내용이 지우개로 지운 듯 뇌리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리니

읽은 시간이 아까워 여기에다 대강 옮겨놓고 두어 차례 더 읽어볼 요량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했다.

앞으로의 독서방식이 매양 이와 같을 것이다.***


제 1부 권력의 탄생

제 1장 피렌체와 피렌체인들

메디치가의 紋章: 패인 방패--메디치가의 시조 아베라르도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인과 대적하여 거인을 쓰러트렸으나 그 과정에서 철퇴에 맞아 패인 방패를 기념하는 문장(금색바탕에 빨간색 공)

**코지모1세에 대한 평가: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히버트는 그를 퉁명하고 불친절하고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가혹했다고 말한다.

-영국의 왕과 귀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태~

김상근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서는 단 한 군데에서도 보지 못한 표현들--

 

--여자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했더니~:양가집 규수들은 미사에 참석하러 갈 때만 거리로 나설 수 있었고 게다가 베일로몸을 둘러야만 했다.

바깥출입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집안의 젊고 귀한 딸들은 침실에서 미사를 드리고 자기집 정원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여자의 웃음소리가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우리나라의 옛날관습과 다를 바 없는 처지, 여자는 남자들의 소품에 불과했나?)

 

--젊은 여자노예들의 삶은 또 어떻구~?: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소유하고 유지, 매매, 교환, 향유, 임대, 임의로 처분할 전적인 권리가 있었다. 노예들은 動産으로 간주되었고 가축과 동격으로 처리되었다.


--피렌체가 흥성한 이유:

부를 획득한 상인은 그 재산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만 했다. 그는 훌륭한 궁전과 너른 가족 로지아, 쾌적한 시골 별장, 개인예배실을 소유하고 가족들에게 적당히 값비싼 옷을 주고, 딸들에게는 상당한 지참금을 마련해 주어야만 했다.

또 하느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후손과 피렌체의 명예를 위해 교회나 수도원 건립에 기부해야 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존경받는 집안이 되려면 돈뿐만 아니라 공직에 종사해야 했다.(법관이 되려하고 금력을 손에 쥐면 귄력을 쥐려 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달라지지 않을까?)


제 2장 메디치가의 등장

-사람들의 시선을 늘 멀리하라

--메디치가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 엄청난 규모의 교황의 재정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

1420년경,메디치은행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체가 되고 유럽 전역에서 가장 수익이 많은 가족사업체로 발전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이 당시에는 통하지 않았나 보다) 1420년 조선 세종 때 집현전 설치


---코지모는 상인이자 교양이 풍부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인문주의자.

그는 부친(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권고에 따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의 부친은 유언하기를,

부자와 강자들은 거스르지 말고 빈자와 약자에게는 항시 자비로울 것을 권했다

이어서,"충고를 한다는 표시를 내지 말고 신중하게 너의 의견을 제안하라.--소송이나 정치적인 논쟁을 피하고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제3장 알비찌가의 적들 

<코지모의 친구들>

1.니콜로 니콜리

부유한 모직상의 아들/준수한 용모/심미안을 지님/까다로움, 멋쟁이/돈벌이에는 관심없고 저택을 가꾸고 예술작품 및

서적, 고대골동품 등을 수집하는 일을 즐김/초서체를 발전시켜 후에 이탤릭체의 기본이 됨

 

2.포지오 브라치올리니(1380~)

가난한 약종상의 아들/단신 상경, 수완과 능력으로 출세하여 일가를 이룬 케이스~

학자 웅변가 수필가 역사가 풍자가 /코지모와 고고학적 연구를 함께함./니콜로의 원고 발굴을 도움

재치있고 매력적이며 지성적.

그의 글자체는 로마자의 기초가 됨.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으며 농담과 연애도 즐겼다. 여러 情婦와 열네 명의 사생아가 있었다. 55세에 18세의 부유한 집 딸과 결혼 (이 정도면 모든 남자들의 로망?)

 

3.레오나르도 부루니(1370~1444)

자수성가한 사람/ 교황청에서 일하면서 큰돈을(? ?) 벌었음.

달변이고 성실하나 경계심 많고 교만함./부유한 집안의 젊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성직을 포기함/글쓰기와 번역에 몰두/시의 대법관 자리에 오름  <피렌체 찬가>를 씀

 

4.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로마냐의 부유한 집안 출신 /몸집이 작음/겸손하고 성자 같아서 코지모가 매우 존경하고 도타운 우정을 나눔/주교 총대리에까지 오름/ 독학으로 히브리어를 배우고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쉽고 빠르게 번역함

 

5.카를로 마르수피니

아레쪼의 귀족출신/ 학자로 대학에서 수사학과 시학 강의/코지모의 모친장례연설문을 씀

 

---코지모와 앙숙인 리날도 델리 알비찌:

코지모의 모든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마침내 그들에 의해 1433년 9월 28일 10년 동안 파도바로 추방한다는 판결을 언도받는다.


제 4장 추방자와 지배자

파도바에서는 저명하고 부유한 유배객을 맞게 되어 신이 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이때 알비찌가 깨달은 것--권력자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쳐들지 말거나 아니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한다.(그는 코지모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코지모의 대리인으로 이용되던 당 실무자들은 공화국에서 추방된 자들의 재산을 싸게 사들이거나 정부주식을 매매해서 자신의 재산을 늘려갔다. (정당한 수단으로 떼부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정치 현안들이 그의 자택에서 해결되었다. 그가 뽑은 자가 직위를 얻었다.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통제하는 자는 바로 그였다.그는 이름만 뺀 나머지 모든 점에서 왕이었다.

 

5장 대주교와 건축가들

피렌체공의회:1439년 /그리스정교와 로마카톨릭교회의 화합을 위한 모임

*페라라에 역병이 번져 옮긴 장소가 피렌체-700여명의 대표단이 입국, 시의 무역업에 도움을 줌/플라톤 아카데미 창설,.훗날 유럽의 사상 발전에 영향을 미침.

 

1.건축가 기베르티:원래 금세공사/훗날 화가, 건축가, 조각가로 활동

23세에 세례당 일을 위탁받았으나 73세에도 그곳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다.

엄격한 완벽주의에다 무자비할 정도로 일해 조수들을 혹사시켰다.

22년만에 북문 완성,

28년만에 일명 천국의문(동문)완성

 

2.건축가 브루넬레스키:

근대건축공학의 아버지

***달걀세우기:달걀을 깨서 세운 이야기가 콜럼버스 이야기(1492)인가 했더니~여기서는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시범적으로 보여준 얘기(1420)라네

16년 공사 끝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을 완성(1436) 세계 7대불가사의

 

3.건축가 미켈로쪼

피렌체 출생/도나텔로의 제자/

*산 마르코수도원 지음

이곳 수도원실에서 코지모는 고리대금업자와 은행가의 죄가 어떻게 속죄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대주교와 토론 후 거액을 기부함

*교황23세의 묘소 건축함

*코지모를 위한 메디치궁

 

6장 전쟁과 평화

밀라노 공작 비스콘티와 알비치 가문은 합심해서 메디치 가문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비스콘티는 나름 야심으로 정부가 낳은 딸과 용맹한 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자를 결혼시킴

코지모는 스포르자에 호감을 느끼고 친해지면서 그가 밀라노공작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와줌. 이 와중에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적대관계가 된다.

결국 밀라노와 피렌체는 동맹을 맺고 베네치아와 맞선다.

아울러 프랑스와도 우호적관계를 유지함

**메디치가에게 십자군전쟁 참가를 종용하며 교황이 던진 미끼:

전쟁참가 보답으로 불멸의 영혼에 대한 대사부를 주겠다.(이 제안을 받아들인 나라는 하나도 없었고 그 자신이 바로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코지모의 비범성:기민하고 기억력이 뛰어난데다 근면하다. 또 지점경영자 선택에 현명하고 그들에게 절대적 충성심을 요구했다./ 지점장들은 기민한 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피렌체공화국의 정치적 대리인 역할까지 했다.

 

7장 예술가와 애도가들

1.도나텔로(1386~1466)

로마에서 금세공사로 일하면서고대예술 공부, 피렌체로 귀환.

*오르산미켈레의<성게오르기우스>

**청동상 <다비드>걸작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하는 유디트>

--코지모는 도나텔로에 대해 아버지다운 책임감을 느껴 그에게 일감이 떨어지지 않게 했으며 도나텔로는 코지모를 너무 사랑해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썼다.(도나텔로가 3살 많음)그들은 사후에 메디치가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허름한 옷차림, 돈에 대한 무관심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도, 행복하게도 해주었다.

2.필리포 리피(수사)

부모를 잃고 수도사가 되었으나 종교생활엔 관심없고 브란카치 예배실에서 작업하는 마사치오와 경쟁하고 싶어했다.

필리포는 거짓말쟁이, 술고래, 사기꾼에다 색을 좋아해 마침내 수도원을 탈출한다.

그러나 수녀들을 위한 제단화 그림이 코지모의 눈에 띄어 발탁된다. 그후로도 계속 여자문제를 일으키고 젊은수녀와 결혼,아들까지 낳는다.

<성처녀의 대관식>

 

3.지오반니 다 피에졸레1387~1455(안젤리코 수사)

세례명은 구이도/ 작고 순진하며 온화하고 성자같았다.

작품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꼭 기도를 올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동방박사들의 경배>

 

제 2부 위대한 메디치(1464~1492 *조선세조10년

 8장 통풍 걸린 피에로

1.피에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1416~1469):국부 코지모의 장남/ /48세에 수장이 됨 /통풍, 관절염.습진으로 고생함.

오랜 질병에도 사려깊고 인내심있고 예의발랐다./냉정한 편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다.

 

피에로 집권 당시 세력이 커진 언덕당의 니콜로 소데리니가 세력을 모아 피에로를 추방하고 정상에 오른다.

그러나 불과 일년만에 소데리니는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피에로는 영광을 되찾는다.

피에로는 국내외의 적으로부터 가족과 시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관대한 기부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가치있는 물건을 살 때는 값을 따지지 않았다. 또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그들을 친구로 삼았다.

말년에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강력한 결단력으로 피렌체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도나텔로

*루카 델라 로비아1400~

*파올로 디 도니(우첼로) <산 로마노의 전투>

*안토니오 디 자코보벤치

*보티첼리(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마돈나의 송가> <동방박사의 경배> <용기>

*베노쪼 고쫄리 <동방박사의 행진>


 9장 젊은 로렌조(1449~1492) 훗날 위대한 로렌조로 불림

천성적으로 쾌활한 성격/ 강인하고 영리하며 활기차고 말을 잘했다.

흠칫 놀랄정도로 못생겼고 목소리조차 갈라지는 높은 비음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즐겼으며 곡조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식사 때나 말 위에서 늘 노래를 불렀다.

성적인 암시나 음탕한 이야기를 좋아했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반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다정하며 우정이 깊고 동물을 사랑했다./유능하고 과시욕이 강하고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19세에 로마 오르시니 가문의 16세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결혼시킨다.

**로렌조의 시:

젊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젊음은 곧 끝나고

사라질 것이니

행복하고 싶으면

그 순간을 붙잡아라

내일은 안 올 수도 있으니

 

로렌조가 유산을 상속받은 처음 몇 년간은 경기와 행진, 음악축제 등의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사실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보다 더 공공오락이 대단하거나 다양한 도시는 없었다.

피렌체는 상업길드 덕택으로 1년에 노동일수가 275일에 불과해서 놀 기회가 충분했다.

*줄리아노(1453~1478, 로렌조의 동생)를 기념하기 위한 1475년의 마상대회는 최고 멋졌다.

이때 줄리아노는 22세, 검은 머리에, 크고 건장했으며 화려한 의상을 입고 마상대회에서 지난 해에 이어 일등상을 받았다.

 

*폴리지아노:토스카나 지방의 법률가 아들. 시인

아버지가 몌디치가를 지키려다 피살된 후 메디치가에서 그를 돌본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의 시>가 높이 평가되었다.

 

제10장 교황과 파찌

--죽이는 것만 빼고 하고싶은 것은 뭐든지 하시오

교황 식스투스4세:1471년 선출됨

어부의 아들/ 설교술이 뛰어나고 신앙심 깊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매력적이고 야심이 큼/집안에 6명의 추기경이 있고 이득이 많은 영주 자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메디치의 경쟁상대 은행가 파찌 가는 교황과 짜고 로렌조 형제 살해음모를 꾸민다

미사 중에 동생 줄리아노는 투기꾼 바론첼리에 의해 살해되고 로렌조는 기민성을 발휘해 사제들의 칼날을 피한다.

이후 파찌가는 완전히 지상에서 이름을 감췄다. 용의주도한 메디치가에 의해.

예를들면 파찌가와 혼인하는 사람은 공화국에서 공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고 그들 반역자들의 죽은 모습을 벽화로 남겼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 담당이었다.

 

11장 피렌체의 구세자

--저 사악의 아들과 멸망의 양자(로렌조를 향한 교황의 말)

로렌조 동생 줄리아노의 정부소생 줄리오는 입양되어 아들처럼 키워졌다.

*교황의 복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쓴 후에 피렌체에 전쟁 선포, 이에 대한 피렌체의 답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임무를 명심하십시오. 그런식으로 남용하다가는 성베드로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피렌체는 자신의 자유를 굳건히 옹호할 것이며 그대의 명분을 아시고 자기를 믿는 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방면으로 일이 꼬이자 로렌조는 단독 나폴리행을 감행한다.

---이 시대의 그 어떤 시민보다 큰 명예와 의무를 지닌 나로서는 내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나라를 위해 봉사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나는 이제 갑니다--이 때가 1479년, 로렌조 29세 때다.

그는 나폴리왕 페란테와 협상하면서 한편 나폴리 노예와 평민들에게 많은 돈을 퍼부어 환심을 샀다.

10주동안이나 협상이 지지부진, 로렌조가 구실을 대어 홀연히 나폴리를 떠나자 그때서야 페란테는 평화협정서를 만들어보냈다.  교황의 야심은 꺾이고 피렌체와 나폴리는 다시한번 동맹국이 되었다.

 

제12장 이탈리아 나침판의 바늘

--만약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다

--로렌조에게 특정한 공직은 없었지만 그가 죽었을 때 공문서에는 '제1시민'이라고 기록되었다.

로렌조는 사업감각이나 재능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메디치은행이 쇠퇴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12년 후에 피렌체 은행업은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로렌조는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교황의 뜻을 좌지우지했으며 이탈리아반도의 평화에 균형을 가져왔다.

그는 이탈리아 나침판의 바늘이었다.

 

제13장 로렌조:후원자 수집가 시인

---그는 그러한 것과 그밖의 모든것을 완전히 이해했다.

로렌조는 그림보다 잘 세공된 보석을 선호했으며 서적과 원고 수집에 열을 올렸다.

활자인쇄기술이 15세기중엽 발명되었으나 피렌체에 인쇄기가 설치된 것은 1477년이었다.

그러나 로렌조는 필경사와 삽화가, 서기를 써서 원고의 사본과 복사본을 만들어 대학도서관에 제공했다.

그는 피사대학과 피렌체대학에 기부를 많이 했다

그는 그리스철학자와 라틴시인들을 존중했지만 못지않게 이탈리아어를 사랑했다.

특히 토스카나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40초반에 통풍으로 고생하며 성격도 거칠어졌다.

1492년 4월 8일, 결국 고통 속에 그가 죽자 주치의는 자괴감과 절망 끝에 자살했다.

 

제 3부 메디치 드라마

1492~1537

--보라! 이 군대를 이끄시는 분은 바로 주 하느님이시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페라라출신/ 궁정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우울하고 내성적/ 엄격한 금욕생활/ 볼로냐의 산 도메니코 수도원에서 7년간 수련수사/1489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 영구적으로 자리잡음

로렌조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메디치가를 강력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함.

그의 예언대로 전쟁과 흑사병이 번졌다.

 

프랑스의 공격 앞에 미리 겁을 먹은 피에로(1471~1503,위대한 로렌조의 장남)는 가족과 보석을 챙겨 베네치아로 도망갔다.  사보나롤라는 두 손 들어 프랑스왕 샤를 8세를 환영했다.(1494.11.17)

 

15장 파문자

--그의 자리가 이미 지옥에 준비되어 있다(사보나롤라)

 

*이탈리아군과 샤를의 전투:

전투는 짧고 격렬했으며 13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야만적이고 유혈적이었다.

이탈리아군은 숫적으로나 무기면에서 열세여서 엄청난 손실을 입음

샤를왕 편에 서고 피렌체시민들에게 각성하라고 설교했던 사보나롤라는 교황과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승들의 비위를 거슬려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진다.(1498년 5월23일)

 

16장 메디치가의 귀환

--프라토읍이 유혈 약탈되었다

 

**피에로의 죽음:(1503년12월)

프랑스가 스페인에 패배하자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익사한다.


**지오반니(위대한 로렌조의 차남)가 가문의 수장이 된다./ 그는 이미 추기경의 신분(16세 때)이었다

키가 크고 지적으로 보임/안색이 창백하고 뚱뚱했으며 시력이 몹시 나빴다./두드러진 들창코에 입은 반쯤 벌림/낙천적이고 괸대함/게으르고 조숙하여 쾌락을 밝힘

 

**추기경이 된 지오반니에게 아버지 로렌조가 보낸 편지:

아버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네가 이런 존경받는 자리에 오른 것은 너의 장점도 너의 지혜 때문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경건하고 모범적이며 정숙한 생활을 통해 너의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드리도록 해라.

나 역시 죄악의 도시인 로마에서는 이러한 충고를 따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현재나 과거를 통틀어 교황청에서 가장 어린 추기경이란다.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실크나 보석은 네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서와 아름다운 책을 수집하고 학식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 낫다.  평범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많이 해라. 네가 꼭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부탁 속에 아들에 대한 걱정을 읽을 수 있다. 결국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렸다.)

 

***죄악의 소굴 로마: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도시에 교황청이 허가한 매춘부가 7000명.

승려들 사이에 매독에 걸린 자가 많았다.


**교황 율리우스2세:어부의 손자/키가 크고 준수한 외모에 말이 많고 신경질적임/ 등극하자마자 24명의 추기경을 이끌고 출정하여 페루지아와 볼로냐를 교회에 복속시킴

율리우스교황 때문에 야기된 스페인과 프랑스전쟁은 유럽 역사상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쌍방 합쳐 2만여 명이나 죽었다.


**피에로 소데리니:피렌체정부의 종신 곤팔로니에레/정직 근면 평범한 행정가/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자문을 받음

**마키아벨리:

마르고 단정하며 안색 창백/툭 튀어나온 이마, 숱이 적은 머리/오래된 토스카나 가문출신/변호사의 아들/소데리니의 의견을 따라 국민병 제도를 시행

 

**피렌체 프라토읍에 들이닥친 스페인 군대:탐욕스럽고 잔혹한 군대에 의해 2000명 이상이 살해됨(1512.8.29)

이로 인해 소데리니는 추방되고 (1512.9.1) 마키아벨리도 자기고향으로 도망갔다

이듬해에 <군주론>이 나왔다

 

17장 파파 레오네!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주셨다. 그것을 즐기자!

 

**추기경 지오반니(1475~1521)의 통치체제:

선친(위대한 로렌조) 때의 행복한 시절로의 회귀를 약속함/놀이나 행렬 등 장려/거리에서 축제의 노래 향연

그즈음 로마교황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로마로 귀환, 교황 레오10세로 등극한다.(재위1513~1521)

**교황 레오10세의 말: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주셨다.그것을 즐기자!"(역대 교황 중 가장 사치스러운 자)

 

프랑스의 새 왕(프랑수아1세)이 등극하자 교황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스페인과 스위스와 동맹을 맺는다.

스위스가 대패하자 교황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제안한다.

그러나 협상은 프랑스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불공평한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에 잠정적 평화가 찾아오자 교황은 먹고 마시고 유흥을 즐기며 점차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백마를 탄 교황 레오10세>라파엘로 작품

한편 그는 돈에 쪼들릴지언정 추기경자리를 팔아서라도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며 로마를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괴퍅한 미켈란젤로보다 고분고분한 라파엘로를 더 좋아했다.

 

제 18장 로마로의 행진

--교황의 사냥놀이--(측은지심이 있는 백성이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들을 교황은 즐기고 희희낙락했으니 인간말종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우르비노공작 로렌조1492~1519:교황의 조카/위대한자 로렌조의 손자/피에로의 아들/결혼 얼마 후 딸 카테리나를 낳고 폐병에 매독이 겹쳐 사망함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4):위대한 로렌조의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사생아?)

레오10세(사촌간)의 급사로 교황의 자리를 넘보았으나 교황은 카를5세왕의 가정교사였던 아드리안 데델에게 돌아갔다(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

그러나 지극히 검소하고 겸손한 새 교황을 못마땅히 여긴 무리들에 의해 1년만에 독살된다.

줄리오는 마침내 꿈을 이루어 25세의 나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자리에 오른다/그러나 천부적인 우유부단함으로 카를5세의 로마약탈을 용인, 르네상스를 끝장낸다

 

19장 포위와 살해

--온건한 조처는 필요없다

로마시로 진격한 황제의 군대에 밀린 교황과 추기경은 상 안젤로 성으로 피신, 도개교를 내림으로써 로마시민들을 적에게 내주었다. 로마는 약탈당햐고 모욕당했으며 포위 첫날 8000명이 죽었다.

 

**안젤로 성 안의 벤베누토 젤리니: 성안의 포격수로, 스스로가 성을 구했다고 말함.

그러나 한달 남짓 원군도 오지 않은 채 버티다가 황제의 사절에게 굴복하고 만다.

**메디치가의 결혼식:

14세의 우르비노의 여공작 카테리나 데 메디치+프랑수아1세의 차남 앙리 드 발루아(1533.10.28)

 

**새로운 피렌체의 지도자:

지오반니의 아들 코지모1세

 

제4부 제국의 몰락

1537~1743

 제20장 공작 코지모 1세

--사람들의 얼굴에서 거의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코지모1세(1519~1574.4.21)55세 /부친은 지오반니 델레 반데 데레(추기경 지오반니가 아님)

졸중발작으로 사망

기품있고 절제된 행동을 했으며 예민하고 조용함 /천성적으로 냉정한 편/

그는 주위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한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

코지모1세는 나폴리의 스페인 총독의 딸 에레오노라와 결혼한다.

1569년 피렌체의 대공이 되고  피렌체해군을 창설, 레판토 전투(1571)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둠

"육지에서만큼 바다에서 강하지 못하면 강한 게 아니다."(코지모1세)

한편, 주위를 불안에 떨게 하는 변덕과 우울증은 도를 넘을 지경이었다.

사냥을 즐기고 검소한 옷과 식사를 했으며 웃을 줄 몰랐다.

1599년 우피치 건물 신축/스페인을 종속상태에서 해방시킴/가난한 이들에게 익명으로 도움을 주고 피렌체 전통오락인 행렬과 기마대회, 칼치오 등을 후원함. 농업발전을 위해 관개시설을 만들고 운하를 파고 올리브농장과 은광을 개발하고 도시와 마을간의 정치적 통일성을 확보했건만 사람들은 죽은자를 칭송하기보다는 불만거리를 찾아내어 비난을 쏟아부었다.(어찌 이리 사람들은 이리 악할까?)

 

21장 코지모1세의 후계자들

그런 놀이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프란체스코1세(1541~1587):코지모1세의 장남/키가 작고 말랐으며 피부색이 어둡고 우울한 성격/옷차림과 행동에 품위가 없었음/

아내가 죽자마자 유부녀의 남편을 제거하고 결혼한다/세상의 비난이 쏟아지자 정치에서 물러나 시골집과 베키오궁의 실험실에 머물며 실험에 몰두했다. 수에 말라리아로 아내와 같은 날 죽는다.

 

**대공 페르디난도1세:(1549~1609)

프란체스코1세의 동생/15세에 추기경이 되어 10년간 로마에 머물렀다. /온화한 성격/후에 종교인으로서보다 행정가의 자질을 발휘했다./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시의 독립을 추구하는 방책을 펼쳤다./정부의 부패가 줄어들고 재정이 안정되었으며 무역과 농업도 번성했다.

피렌체에 병원이 세워지고 피사에는 학자들을 위한 대학이 설립되었다./부친이 창설한 함대는 더욱 강해지고 리보르노(작은어촌 마을을 메디치가가 사들여 많은 건축물을 짓고 제1의 항구도시로 만듦)는 더욱 발전했다. 종교적 아량을 베풀어 개신교도, 유대인들이 많이 리보르노로 이주함/가난한 처녀들에게 지참금을 주어 결혼하도록 도와주었다./난공불락의 금고를 만들기도 했지만 필요할 때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렝의 크리스틴과 혼인하면서 벌인 축하연은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그의 궁정축제의 절정은 조카인 마리아와 프랑스왕 앙리4세가 베키오궁에서 결혼할 때였다.

이때 최초의 오페라로 추정되는 <다프네>가 공연되었다.(작가는 페르디난도의 부정적인 면은 거의 언급이 없었다.

피렌체가 부흥할 것 같은 기운이 돈다.)

 

**대공 코지모2세(1590~1620): 19세에 대공이 됨. 호화로운 유흥을 이어감.

건축에 관심이 많은 코지모는 포지오 임페리알레를 세워 갈릴레오 갈릴레이(피렌체 귀족가문의 가난한 후예/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성질 급하고 독단적이어서 피사대학에서 퇴출당함, 파도바대학에서 코지모와 사제간인 갈릴레오는 코지모의 권유로 피렌체에 와서 메디치가의 보호를 받음, 사후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가 피렌체로 가져온 망원경을 설치하고 그에게 피신처를 제공함.

 

22장 페르디난도 2세와 프랑스공주

-그녀는 늘 우쭐대며 자기보다 지체가 낮은 이와 결혼했다고 말하곤 했다.

 

**페르디난도 2세:(1610~1670.5.2)코지모2세의 장남/ 낙천적이고 쾌활/온화하고 예의바르며 귀족의 풍모/살이 두툼하고 호인/그러나 승부욕이 강해, 지면 딴사람처럼 변함/역병이 돌 때 병든이들을 최선을 다해 돌봐줬다.

페르디난도2세와 동생 레오폴도는 갈릴레오의 제자로 둘다 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동생은 특히 독서광이었다.

페르디는 정치쪽으로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걸 원치 않았고 피렌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어떤 제안도 수용했다.

아내 비토리아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얻었는데 둘은 죽고 세째가 뒷날 코지모 3세가 된다.

그는 대공비의 의도에 따라 전통적인 방식대로 사제교육을 받았으며 극장보다 예배당을 더 좋아했다.

1661년 4월 17일, 15세의 프랑스 신부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18세의 코지모3세는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피렌체

피티궁전 안의 보볼리정원에서 2만관객을 모아놓고 성대한 결혼축하행사를 치른다

그러나 둘은 첫대면에서부터 소 닭보듯.

제멋대로 거만을 떠는 마르그리트로 인해 코지모 3세의 결혼생활은 문자그대로 엉망진창이었고 시아버지 페르디난도는

곤욕을 치렀다

 

23장 코지모 3세(1642~1723)와 태공 페르디난도

**영국을 다녀온 코지모의 소감--"영국이라는 낙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부친의 뒤를 이은 대공 코지모: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함

아내의 별거 선언,1674년 둘은 공식적 별거에 들어갔고 둘은 자유로워졌다.

프랑스로 돌아온 마르그리트는 도박과 문란한 성생활로 많은 돈을 썼으며 그때마다 코지모에게 돈을 청구했다.

아내를 떠나보낸 코지모도 속편하기는 매한가지--

먹고 마시는 일에 더욱 열중했으며 종교적으로는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었고 이단과 부도덕성을 소탕했다. 교제가 금지된 여자와 관계를 하면 고문을 당했으며 동성애나 재산관련 범죄는 사형에 처해, 한해에 사형당한 자가 2000명이 넘었다.

성직자에게는 특혜를 주고 창녀와 상인들에게서는 많은 세금을 걷어 원성을 샀다.

 

**태공 페르디난도(1663 ~1713):코지모 3세의 장남

잘생긴 얼굴/원기 넘치고 지적이고 예술적이며 독립적/15세에 상아제조술 터득/연주자이며 가수/헨델을 초대해 작품제작에 참여하게 함

부친의 뜻에 따라 결혼했으나 금슬이 좋지 않았고 자식도 낳지 못했다. 패르디난도는 베네치아에서 매독에 걸렸다.

 

 

24장 메디치가의 최후

--피렌체는 과거보다 많이 쇠락했다.

 

지안 가스토네:(1671~1737.7.9)65세/ 페르디난도의 동생/코지모의 둘째아들/내성적이고 고독함/식물연구, 골동품연구,

외국어공부를 즐김/인상좋고 온화하며 사려깊었으나 가까운 친구도 야심도 없었다.

결혼한 아내는 추녀에다 어리석고 싸우기 좋아하며 고집세고 매력이 전무했다.

게다가 남편은 동성애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이들어 가스토네는 나태하고 호색성을 버리지 못한 채로 알콜중독에 빠져 살았다.

잠시 피렌체 통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가지를 쇄신했으나 게으름 때문에 정치에서 멀어졌다.

침대에서 식사했으며 식사시간도 제멋대로였다.

무력한 대공은 65세까지 살다 죽었다.

그가 죽자 피렌체는 오스트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메디치가의 마지막 대표자, 안나 마리아:(~1743)75세.

키가 크고 위엄이 있으며 다소 오만함./독실한 신자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함

그녀의 유언장에는, 조상들의 유물이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반출되서는 안된다고 썼다.(그녀 또한 메디치가 사람이라

보물을 피렌체에 남겨 두어야 훗날 자손들이 관광객 수입으로 잘먹고 잘살 수 있을 것을 내다보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