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문학동네
17.이중섭과 제주
18.김정희와 제주
19.김동리와 하동
20.남인수와 진주
21.유택렬과 진해
22.문장원과 동래
23.암각화와 언양
24.박세환과 경주
25.이인성과 대구
26.이상화와 대구
27.별신굿탈놀이와 안동 하회
28.정지용과 옥천
17;이중섭(1916~1956)과 제주
호 대향/평남 평원군 송천리 출생/오산고보를 나와 일본 유학, 미술을 공부함
(222)오늘 나는 그가 위대하다면 그 위대성은 '생애와 작품'을 뭉뚱그려 위대한 것이며, 사실 예술가의 참다운 위대성이란 결코 그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가난한 유대의 예수처럼 모든 상처를 그 혀로 핥으려 했고, 빈한했지만 포용하려 했으며, 다른 이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려 했다. 이 나라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사랑했고, 게와 닭과 물고기와 나무를 사랑했다.
18;김정희(1786~1856)와 제주
충남예산 출생/실학자/박제가에게서 배움/병조판서 지냄/헌종 때 9년간 제주도 귀양살이/후에 또 북청에 1년간 귀양 감/과천 관악산 기슭에서 말년을 보냄/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음
(230)밤 늦은 시간 관 속 같은 토방에 누우면 '못살포'라고 까지 불리던 모슬포 쪽에서 불어오는 미친 바람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를 냬며 사나운 기세로 덤비곤 했다.위대한 예술의 성취란 인생의 이러한 혹독함 뒤에야 비로소 그 대가로 오는 걸까.
오관을 정지시켜 버릴 듯한 파천황의 추사제와 바스러지는 먹선 몇 개를 그어 이룬 명작 '세한도'가 탄생한 것이 바로 저 토방에서 지낸 쓰라린 유배기간 중이었으니 말이다.
(232)그는관아에 묶여가 40여 일 동안 참혹하고 혹독하게 문초를 당했으며 "천만 인이 모두 죽이려 들었다"고 술회했다.
--머나먼 남쪽바다 그 유배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그를 일으켜 세웠던 것은 사람의 따뜻한 정이었다. 대둔사의 초의선사가 그랬고, 진도청년 허유, 제자이며 역관이던 이상적이 그랬다.
세한도('추운 시절의 그림')는 이상적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다.
"겨울 당한 이후에야 소나무, 잣나무 진가를 알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 좇아가는데이 절해고도 유배지에 있는 초췌하고 마른 나에게 그대는 천만리 먼데서 산 이와 같은 것을 보내주니 그대와 나의 관계는귀양 전이나 후가 더하고 덜함이 없구나."
(233)이 작품은 일본인 후지쓰카의 손에 들어갔다가 후에 진도 청년 서예가 손재형이 찾아옴
(238)추사제는 상형문자로 시작한한자가 태생적으로 가진 회화미를 잘 살렸으며, 글씨가 아닌 하나의 그림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
19;김동리(1913~1995)와 하동
경주출생/한국 순수문학의 거장/'백로','화랑의 후예', '산화'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이다/'역마', '등신불', '까치소리' 등의 주요작품이 있다
(243)때때로 사랑에는 눈이 없다. 그것은 암흑 속에서 거칠게 숨을 쉰다. 그래서 윤리적 '구별'과 '선택'이 되지 않는다. 암흑 속에서 사랑은 불덩이가 되어 돌진해 가는 것이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하다. 그 불덩이가 닿는 곳마다 위험하다. 운명적 사랑일수록 더 그렇다.
(243)동리의 소설에는 그 배경이 되었음 직한 현실 공간들이 자주 짚어지는데 '역마'의 화개장터나 쌍계사 그리고 칠불암 가는 길처럼 소설적 상상력이 확연한 현실 지평 위에 뿌리내린 경우는 없다
(245)화개는 이름답다. 특히 봄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봄의 화개에서라면 나는 죽어도 좋았다."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을 정도니까.아름다움도 지나치면 죄가 된다 했는데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확실히 죄업이다
20;남인수(1918~1962)와 진주
'내고향 진주'라는 노래도 있다/'무너진 사랑탑'은 그가 죽기 직전 각혈을 쏟으며 취입한 노래다/박시춘과 명콤비/눈물의 해협, 비젖는 부두,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실소, 항구의 하소, 눈물의 사막길, 물방아사랑, 인생극장, 유랑마차, 천리타향, 잘 있거라, 북국의 외론 손, '애수의 소야곡'(1930년대 대표곡 중의 하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히트작/20여 년의 짧은 가수 활동 동안 천여곡에 가까운 노래를 부른 가요황제/진주 남강댐(진양호)호반에 남인수 동상이 있고 생가와 묘소가 유적지로 남아있다.
*남인수신생을 흠모하고 스승으로 모시는 신해성씨의 증언:
"선생의 노래는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마다 서민들에게 삶의 고개를 넘는 힘이 되어 주었지요.'애수의 소야곡'과 '감격시대'가 그렇고 '가거라 38선'과 '4 19학생 의거의 노래'가 그랬습니다."
"선생의 노래는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으며 희망의 지평을 가리켰지요"
"사람들은 대중예술을 사랑하고 나중에는 그것이 대중예술이었다고 해서 버립니다.우스운 일입니다.서글픈 일이지요."
(꽃피는 봄이 오면 진해로, 하동으로 구례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김병종씨,
그림은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왠지 신비스럽고 보는이의 기분을 밝게 해주어 좋고, 글 또한 사람을 휘어잡고 놓지 않으니 당신이야말로 타고난 글쟁이요.)
21;화가 유택렬(1924~1999)과 진해
함남 북청 출생/1ㆍ4 후퇴 때 진해로 오게 됨/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냄/
(268)진해에 가려거든 부디 벚꽃 만개할 때만은 피해야 한다. 아름다움의 한가운데마다 말갛게 고여있는 슬픔의 빛을, 속 부풀어오는 그 꽃의 양감 속에서 언뜻 보아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해에는 벚꽃 말고도 설화처럼 숨겨진 이름이 있다. 흑백다방. 벚꽃놀이 인파에 섞여 둥둥 떠다니다가그 흑백다방에 들러 커피향 속으로 녹아드는 '모짜르트의 '눈물의 날' 한 곡 듣지도 않고 휑하니 올라와 버린다면 진해를 제대로 만나고 온 것이 아니다.
(269)흑백다방. 화가 유택렬과 피아니스트 유경아 부녀의 집. 생전에 이중섭과 윤이상과 청마와 미당과 김춘수 같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사랑방 같은 곳. 음악감상실이자 연주회장이었고 화랑이자 소극장이 되어 왔던 곳. 60년이 다 되도록 물처럼 고요하게 그 거리 그곳에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진해문화의 등대.
(272)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던 유화백이 스트라빈스키와 말러와 하차투리안 음악 속에서 늘 클레와 몬드리안과 세잔의 빛과 색을 함께 본다고 고백했다는.
확실히 그의 추상화 속에서는 진해바다의 깊고 푸른빛과 그 바다에 내리는 새벽안개와 바람에 날리는 4월의 벚꽃이 숨쉬고 있었다.
22;춤꾼 문장원(1917~2012)과 동래
부산 안락동 출생/고입 실패 후 기생집을 드나들며 춤을 익힘/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동래야류로 대통령상을 받음/그 덕에 동래야류가 정부의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됨 /문장원도 동래야류와 동래한량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됨
(280)낙동강 700리의 윗물에 안동벌 하회탈춤이, 끝물에 동래야류가 있다. 동래야류는 가무음극이 어우러진 토종 오페라다.
(281)"내 춤은 기생판에 휩쓸려다니며 배운 것이고 따라서 내놓을 것도 못된다"고 했다.
그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유장하기로 정평이나 있지만 말씨만은 짧고 거침이 없다.
(282)원래 동래는 물 많고 음기 센 땅이란다. 그래서 여자와 예술이 두드러졌다고 말한다. 일찍이"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 기생 치마폭은 못 벗어나고, 일본 형사 앞에는 서있어도 동래 기생 앞에서는 무릎 끓고 만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285)삼현육각에 구음 곁들여 시나위가락이 어우러지면 두 팔 벌리고 선 체로 온몸으로 그 가락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그의 입춤은 정중동의 춤이요, 선화처럼 움직임을 최소화한 춤이었다. 또한 그의 장기의 하나였던 '원양반 탈춤'역시 지체 높은 사람의 춤답게 위엄 갖춰 관복을 차려입고 잡스러운 동작을 모두 생략한 자태로 무기교의 기교와 절제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23;암각화와 언양(울산)
언양 북쪽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 4.0km'/1971년 발견/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상이 담겨 있다/테두리에는 300자가 넘는 신라명문이 새겨져 있다.(525,539년)
(293)언양에 유배와 있던 포은도 반구대의 수려한 풍광(대곡천 비경)에 취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다.
신의 밑부분은 물에 잠기면서 넓적넓적한 바위들로 커다란 화폭을 이루고 있다.
(295)배를 저어 장엄하게 펼쳐진 '바위의 화면'으로 다가가 본다. 가로10m 세로 3m 정도의 화폭 따라 2백여 점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건만--사연댐 물에 잠겨 볼 수가 없다. 사슴과 호랑이와 멧돼지 같은 사냥 미술과 종교적 상징과 비의로 가득찬 암각화는 이곳에서 그대로 선사의 시간을 숨쉬고 있다.
24;광대 박세환(1944~ )과 경주
밀양박씨 종가의 종손/17세에 동춘서커스(조선 최초의 서커스단)에 홀려 광대가 됨/단장 박동수의 양아들이 됨/의부가 죽자 33세부터 동춘서커스를 이끌게 됨
(307)허다한 예술가들이 제각기 땅과 풍토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길어올렸다면 박세환은 스스로 얘기했듯이 경주라는 왕도의 풍토에 난 가시엉겅퀴요, 잡풀이다.
(313)1927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공연을 선보인 이후 1960~70년대에는 250명이 넘는 단원과 유명 배우,희극인들이 함께 활동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 당시 서커스는 스타배출소 역할도 했다. 허장강, 서영춘을 비롯해백금녀,배삼룡,남철, 남성남,정훈희 등이 동춘출신이다.
25;화가 이인성(1912~1950)과 대구
11세에 재능을 인정받고 선전에 입상하자 대구 유지들이 후원해서 일본유학을 떠난다/그는 총 23회 열렸던 선전에서 18회 입상하는 기록을 세웠다/요미우리신문에서 그를 '조선의 천재'로 소개함/
귀국 후 이화여중 미술교사로 근무/작품--여름 어느날, 경주의 산곡에서, 초춘의 산곡, 아리랑고개
(320)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 유화를 공부해 18세에 선전에 입선 특선을 거듭하다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26세에 선전 추천작가가 됨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뿐 아니라 해방 후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322)"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것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323)목포나 광주가 전통미술 쪽에서 강세를 보였다면 대구는 확실히 서양화 쪽에서 괄목할 강세를 보였다. 1930~1940년대 이후 대구는 빛나는 별 같은 서양화가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주요 거점 도시인 그 대구에는 아직 시립미술관이 없다.
26;이상화(1901~1943)와 대구
명문 이장가의 후손/중동학교 3년 수료/일제의 탄압과 재산몰수로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일본 유학 때는 관동대지진을 목격함/생애 가장 힘들었던 20대에 시를 가장 많이 씀/대구방언을 많이 사용/수시로 옥살이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음/대구 계산동에 이상화 고택이 있다/달성공원에는 이상화 시비가 있다./
(329)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병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병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언어와 따뜻한 위로의 말로 치유되는 것임을.
27;별신굿탈놀이와 안동 하회
(340)어느 날--하회에 갔다.
그곳에 가서 나는 흰 모래톱에 앉아 저녁이 될 때까지 강물만 바라보았다. 그때 비로소 자연이 사람의 가슴을 모성처럼 포근히 감싸머 위로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강물은 어지럽던 마음을 정화해 주었고 쏴하는 솔바람 소리는 '괜찮다 괜찮다'며 가슴을 쓰러내주었다.성근 별이 떠오를 때까지 하회의 모래밭에 누워,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341)서풍이 미친 듯 춤을 추고 예와 의가 흙담처럼 무너질 때, 그리고 눈앞의 보잘것없는 이익을 좇아 예사로이 지조를 꺾는 일이 난무할 때, 나는 안동 유림의 카랑한기침 소리와 기상 굽히지 않는 하회의 소나무를 생각한다.
안동, 하회는 퇴계, 겸암, 서애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큰 맥을 잇고 있지만 동시에 민속과 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성주풀이의 본산이 안동제비원이라고 가사에 나와있을만큼 이일대는 영남 무가나 농요의 밀집지역이다.
(342)헛제삿밥:흉년에 유생들이 가짜 제사를 지내고 제상의 음식을 먹은데서 유래한 것으로 유생들의 체면도살려주고 포식도 할 수 있게 하는 절묘한 발상의 음식상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무용,조각,연극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보름 동안 열린다/ 예의 신명을 빌려 몸의 반란과 하극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춤사위와 재담을 통해 즉흥성과 현장성을 살리는 것이 특징
28;정지용(1902~ 1953? )과 옥천
언론사 주간/이대교수 역임/6 25때 서울에서 강제 납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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