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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기행1 채만식~김승옥

맑은 바람 2021. 2. 10. 00:49

김병종 지음/문학동네/362쪽
읽은 때 2021.2.6~2.13

화첩기행 전 5권 중 마지막 1권을 읽는다.
근래에 이 화첩기행을 만나서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읽었다.

책이라는 변치 않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가!

목차
1.채만식과 군산
2.이매창과 부안
3.이삼만과 전주
4.서정주와 고창
5.임방울과 광산
6.운주사와 화순
7.강도근과 남원
8.조금앵과 남원
9.최명희와 남원
10.김명환과 곡성
11.황현과 구례
12.이난영과 목포
13.진도소리와 진도
14.허소치와 해남
15.윤선도와 보길도
16.김승옥과 순천
17.이중섭과 제주
18.김정희와 제주
19.김동리와 하동
20.남인수와 진주
21.유택렬과  진해
22.문장원과 동래
23.암각화와 언양
24.박세환과 경주
25.이인성과 대구
26.이상화와 대구
27.별신굿탈놀이와 안동 하회
28.정지용과 옥천

1;채만식(1902~1950)과 군산
(12)군산항. 옛이름 진포.채만식이 소설 '탁류'에서 '눈물의 강'이라고 불렀던 금강의 끝머리에서 시작되는 항구
(15)당시의 군산항 미두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탁류가 현실에 상상력을 약간 보탠 정도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군산을 수준높은 문학도시로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고 있는 이가 시인 이병훈이다. '채만식 문학관', '채만식 문학비'가 다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16)'탁류'를 보면 1930년대의 조선사회가 보이고 군산이 보이고 서민의 삶이 보이는 겁니다.
(18)숨을 거두면서도 남이 쓰던 꽃상여 빌려다 내 몸을 담지 마라. 차라리 목관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들국화로 덮어 묻어달라고 했을 만치 정갈하고 소박한 성품이었지요.

(17쪽). 바다와 소년


2.이매창(1573~1610)과 부안
(25)조선조 최고의 여성 시문학을 일구어낸  천재예술가/그녀의 작품은 한시로 남아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촌은 유희경,  교산 허균이다.
(26)평생에 기생된 이몸 부끄러워라
달빛젖은 매화만 홀로 사랑하네
세상사람 내 그윽한 뜻 몰라주고 오가는 사내마다 수군대고 집적대네
(29)현리 이탕종의 서녀. 총명을 타고나서 남장을 하고 서당에 다녔다.
(30)부안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이 매창뜸에 매장했다. 지금 이곳은 매창공원으로 단장했다.
생전에 그녀가 자주 놀러갔다는 개암사에서 아전들은 그녀의 시들을 모아 그녀 사후 58년만에 목판본 책으로 묶어냈다.그 시집이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이었다 한다.
(34)대표시 '이화우 흩날릴 제'는 '가곡원류'에 실려 지금까지 전한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님은 유희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유희경이 매창을 그리며)

(31쪽) 사랑의 시심

3;이삼만(1770~1847)과 전주
(39)호남의 추사 창암 이삼만/우리 근대 서단의 걸출한 서예가/중인 신분
이 신화와 전설의 인물 이삼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는 전주에 사시던 서예가이자 한학자인 고 작촌 조병희 선생이었다.(가람 이병기선생 누님의 아들)
(43)작촌선생은 창암을 존경하는 이유로우선 그 거침없는 '유수체'를 든다.그것은 글씨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이라고 했다. 뱀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신필이라고 했다.(그래서 입춘 때 벽사를 위해 이삼만의 글씨체를 썼나 보다)
(44)이삼만의 글쓰는 태도:磨穿十硯  禿䀆千毫--열개의 벼루를 구멍내고 천필의 붓을 닳게 한다

4;서정주(1915~2000)와  고창
(56)판소리의 사설을 집대성한 신재효와 최초의 여류 국창 진채선, 국창 김소희가 바로 이 고창 출신이다.

5; 임방울(1904~1961)과 광산(전남)
(67)그 명창 임방울의 북은 이제 홀로 울고 있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광산문화원의 빈 사무실 낡은 캐비닛 위, 헌 신문지 더미와 박스들 속에서 한 시대의 심금을 울렸던 임방울의 북은 주인 떠난 뒤 오랜 세월  짐짝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다.---얼마만큼의 세기가 지나야 우리도 예술 유적을  아끼고 보존하는데 유럽이나 일본의 절반 수준 쯤이나마 다다를 수 있을까
(71)일세를 풍미한 곡:쑥대머리, 추억/망우리에 묘가 있다


6.운주사와 화순
(79)화순:능주, 동복, 청풍, 이서 일대에 여러 신령한 산을 거느리고 있어 석탄이나 규석 같은 자원뿐 아니라 모란이나 작약과 인삼 등 약초도 성했다.
화순인삼은 동복천의 복천어, 토종꿀인 복청과 더불어 화순 삼복에 든다.
화순은 물과 돌의 고장이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곳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이 있다.
(현재는 석탑17기, 석불80여 구가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에 운주사가 나오면서 널리 알려짐

(80쪽) 운주사 석불

7;강도근(1918~1996)과  남원
명창 송만갑의 수제자인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의 문하에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움/깅도근은 안숙선의 스승/동편제왕으로 불림/그의 소리는 쉰 듯하면서도 힘있고 윤기있는 '천구성'이 특징/제5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
(96)남원이 일찍이 소리문화의 요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들과 물이 풍부해 먹고 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을것이다.
남원 출신의 명창들:송홍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강도근, 유성준,김정문, 이화중선,박초월,장재백, 배설향, 안숙선, 강정숙, 전인삼
(우리 역사에 명멸했던 세계적 인물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기록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파급 속도가 영화만한 게 있을까? 다방면에 박식한 김병종 저자가 관광공사의 문을 두드려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낸다면 '기생충'이 누리는 호강 저리 가라로 세계인의 시선을 끌 텐데--)

8;조금앵(1930~2012)과 남원
여성국극의 최고 스타/주로 남성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칼싸움 등 액션을 선보이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여성국극단이 활동을 시작했다.그러나 불과 10년,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와 영화산업의 발달로 사양길로 들어선다.
전설적 가인 임춘앵이 있다. 조금앵은 임춘앵의 제자./1996년 화랑문화훈장 받음

9;최명희(1947~1998)와 남원
전북대 국문과, 서울보성여고에서 9년간 국어교사로 재직.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1부)이 당선
1988년 9월부터 신동아에 혼불2부 연재만 7년 2개월 동안 제5부까지 집필,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
(124)작가의 모국어 정신이 오롯이 담긴 이 작품은 우리말 고유의 리듬과 울림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어 소리내어 읽으면 그대로 판소리가 된다고 할 정도다.
(121)혼불 1권을 쓰고 났을 때였다. 그녀는 힘없이 내 작업실에 전화를 걸어왔다.
"어쩌면 신문에 월평 하나 써주는 사람이 없죠?"
나는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했다.
"원래 벽화를 그린 화공을 닮으려던 것 아니었던가요. 화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건만 벽화는 아직도 살아 빛을 발하지 않나요?  걱정 마세요. '혼불'도 그럴 겁니다."라고.
(123)최명희는 부친의 생가가 있던 이곳(남원의 풍악산 끝자락에 매달린 것 같은 노봉 마을)을 무대로 벽화를 그린  장인처럼 손가락으로 바위를 파듯 소설을 써놓고 기진하여 떠나버렸다.

10;국고 일산 김명환(1913~1989)과 곡성
전남 곡성 옥과면 무창리 출생/66세 때 중요 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됨
(128)예의 자유, 조선 명고 김명환이야말로 일체의 권위와 인습과 타성을 벗어 던지고 예의 자유경에서 노닐다 간 사람이다.
(130)사실 소리마당에서는 소리하는 이가 주역이 되고 북은 으레 소리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만 김명환은 예외였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그의 북은 거의 늘 소리를 끌고가며 압도했다.

(131쪽)깨어나는 봄의 섬진강변


11;매천 황현(1855~1910)과 구례
우리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인/구한말 격동기의 대표적 시인
(143)매천야록--1864년(고종원년)부터 1910년(순종4년)까지 47년 간의 역사를 특유의 비판정신과 민족의식으로 기록함.
1910년 9월7일 새벽, 한일강제병합의 비통한 소식이 날아든지 엿새후의 새벽, 아편을 과량 삼켜 자결했다.
(144)지리산 밑 수월리 월곡마을에 있는 매천사에 황현의 신주를 모셨다.
(150)29세 때 보거급제시에서 1등을 했으나 배경이 빈천한 걸 알고 2등으로 강등시켰고 회시 전정보에서는 아예 매천의 이름을 빼버렸다. 과거제도의 부패상을 본 매천은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귀향했다.

12;이난영(1916~1965)과 목포
제목 목포의 노래(뒤에 목포의 눈물로 바뀜)
작사(향토노랫말)문일석
작곡 손목인
노래 이난영
(157)부친이 선창에 나가 날품팔이를 해야만 했던  어려운 형편이어서 그녀는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얼기설기 다니다 말다 하면서 학교공부를 끝낸다.  그러고 보면  '노래'란 애초부터 가르치거나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건 가슴에 고이는 물줄기 하나를 길어올리는 일이었다.
제주도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엄마를 돕다가 주인에게 목소리를  인정받은 게 계기가 되어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160)고복수의 '타향살이'와 더불어  '목포의 눈물'은 나라뺏긴 동포들이 모국어로 부르는 애절한 국민적 연가였다.
(163)목포 이난영 공원 안에 수목장으로 모셔짐

13;진도소리와  진도
진도:징하게 이쁜 섬/남화의 성지라 불리는 허소치의 '운림산방'이 있다/예향 중의 예향/진도 예술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소리다/진도소리는 야스럽다.실제로 들판에서 만들어진 것이 많지만 내용도 야한 것이 많다.
(167)진도에 유난히 단가와 노동요 그리고 잡가가 성했던 것은 그것이 생활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일하며 흥얼대고 흥얼대며 일하다 보면 노래가 먄들어지곤 했다.그래서노랫말은 다듬지 않은 일상 구어체가 태반이다.
(172)진도의 노동요들은 힘들게 일하며  나오는 노래이면서도 원망과 한탄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해학이 일미다.
(174)진도소리는 무가나 만가가 많고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진도 씻김굿/다시래기/진도만가가 그들이다.
그밖에 널리 알려진 진도소리는
남도 들노래/강강술래/진도 북놀이/진도 아리랑이 있다.
(175)진도 소리 여행
진도향토문화회관/국립남도국악원/진도 소포리의 남도소리 기행체험/소포전통민속 전수관

14;허소치(1809~1892)와 해남
(183)초의는 독학으로 그림 그리다 일지암으로 찾아온 진도 청년 소치 허유에게 그림은 물론, 시와 차를 가르쳐 추사 문하에 입문시켰고, 그 소치는 배를 타고 바닷길 3백리를 헤쳐 제주까지 추사의 귀양지를 오가며 서화 수업을 받았다.
시골 청년이었지만 당대 최고인 두 스승 밑에서 배운 소치는 그 나이 마흔을 갓 넘어 헌종 앞에 나아가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고 욍실에서 소장한 오래된 그림과 글을 품평할 만큼 대가가 되었다.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만한 사람이 없다"--추사의 말
(188)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호가 대치였는데 추사는 대치만큼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의미로 허련에게 소치라고 호를 주었다.
만년에 소치는 운림산방에 은거하며 차밭을 돌보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스승 초의가 일지암에서 한 것 같이 차와 선과 그림이 하나되는 세계를 일구어 갔다.
**의재 허백련(1891~1977)진도 출생/허련의 족손(같은 성을 가진 일가로서 유복친~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 안에 들지 않고 항렬이 손자뻘이 되는 사람)

15;윤선도(1587~1671)와 보길도
윤선도는 한양 연화방--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으나 해남에서 자랐다.
(190)김병종이 스물쯤에 만난 보길도:달은 얇게 사위어가고 밤바다의 파도만이 적막을 깨뜨렸다.그 밤 애송리 밤바다의 파도에 취해 그만 통곡하고 말았다. 황홀하고 아름다웠다.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울 수 있느냐고?  있고  말고다.
(193)왕자의 스승으로 경학, 천문, 지리, 공학, 건축부터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이루지 못한 글이 없었고 통달하지 못한 학문이 없었건만, 서른 살에 시작된 귀양살이는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기간만 20년에 삭탈관직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을 앞세운 고통도 겪었다.
한시와 한글 시조를 망라한 그의 단가문학들은 모두 이렇게 아픈 세월의 일기였던  셈이다.
(198)그러나 속절없다. 낙서재. 그가 처음 보길도를 찾던 해(1637)산의 혈맥을 좇아 명당에 지었다는, 마지막 이승의 인연을 접었던 그 집은 흔적이 없다.
(199)병자호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않으려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에 들렀다가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16;김승옥(1941~ )과 순천
무진기행/서울, 1964년 겨울
/순천만 부근에 그의 문학관이 있다.
(203)무진기행은 왜 그토록이나 나를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았던가. 그것은 소설속의 진득한 '허무와 자신에게로 향해오는 칼끝과도 같은 예리한 자의식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체'의 새로움 때문이었다. '청각의 이미지를 시각의 이미지로 바꾸어놓는 '기법은 김승옥의 문학 도처에서 빛을 발하곤 했다.
(209)그는 빛나는 문체와 빼어난 감성의 문학세계를 보여주면서도 가벼움과 경박함에 빠지지 않았다. 언제나 영혼의 문제에 대해 끌어안고 고민한다는 신뢰감을 주었다.
**어느 신앙 간증회에 나온 김승옥의 고백:그는 유년 때 겪은 여순반란 사건과 20대의 허무주의 등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 언어로 더는 죽음과 같은 문제와 인생의 불가해성을 설명할 길 없어 절필하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212)김승옥의 문학은 일단 기교면에서 탁월하다. 어찌 보면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와 같고 언어의 조탁 기술이 탁월한 세공업자와 같다. 그러나 그는 언어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쏟아 글을 썼고 그래서 그의 소설은 가슴에 둔중하게 얹히는 무게를 가지고 다가온다.
(212)나는 예나 이제나 김승옥이 좋다. 옛날엔 그 빛나는 문학적 재능이 좋았고  이제는 그 어수룩한 성자같은 사람됨이 좋다. 예나 이제나 각각 세월의 다른 모퉁이를 돌아와 우연히 차 한 잔을 나누고 싶은 이름이다.

(김병종의 글은 읽는 내내 묘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가슴 설레임 같기도 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영화 같기도 하다.
적막한 슬픔 같기도--- 아무튼 편안함과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는-- 아마도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이 평탄하고 객관적으로 행복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어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