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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내 안의 이집트

맑은 바람 2022. 11. 21. 01:16

강인숙 지음/마음의 숲 발행/2012.9출간/367쪽/읽은 때2022.11.13~11.20

강인숙(1933~ )함남 갑산 줄생/영인문학관 관장

저자는 40년간 키워온 이집트여행의 꿈을 2008년 75세의 나이에 이루었고, 나 또한 2012년 이 책을 접한 후 더 가고 싶어진 이집트여행을 2022년 75세의 나이로 떠나려 한다.

(1-3)이집트문명은 돌의 문명:

찬란한 화강암이 모래 속에 있다.
그것을 꺼내서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신전, 석조건물, 석상을 만들었다.게다가 누비아에는 황금이,시나이반도에는 터키석 광산이 있다./하지만 신들이 이집트에 내린 가장보배로운 선물은 나일강이다./나일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나일은 '강'이라는 뜻/세계에서 두번째로 길다/마실 물, 목욕 물,반찬거리,집 지을 진흙, 교통의 통로를 제공한다/그리고 비옥한 농토를 제공한다/풍요신 하피가 지배하는 곳/
(25)오시리스:

인간세계를 가장 사랑했다/이집트인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저승의 신으로 피부가푸르다/도리깨와 지팡이를 양손에들고 흰옷을 즐겨입었다./밀과 포도 재배법을 가르쳤다./이집트 밀은 양도 풍부하고 맛도 좋았다/시저를 이집트까지 원정하게 만든 요소 중의 하나가 밀이었다
(29)고대이집트는 사람이 만든 천국이다.

물을 다스림으로써 세계를 빛낸 경이로운 첫 문명이 그 땅에서 탄생했고, 몇 천년 간 지속되었다.*나일의 길이는 6500km
(34)이집트인들은 역사의 시발점에서 모든 건축과 예술의 아이디얼 모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은 그 모델을 일사불란하게 3천년 동안 답습했다.거기에서 이집트 문명의 잠재력이 형성된 것이다.
(35)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난 기원 전 30년부터 2천년 동안 이집트는 줄곧 외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로마가 왔다 가면 아랍이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터키가 오며 그뒤를 유럽의 열강들이 몰려와 그땅에서 각축을 벌였다.1952년에 독립할 때까지 이 나라에는 주권도 없었다. 신성문자는 잊혔고 고대 이집트문명은 파괴되거나 모래 속에 매몰되어 풍문으로만 남아 있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원정대가 와서 잊힌 이집트를 흔들어 깨우기까지 고대이집트 문명은 땅속에 묻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78)사막은 신의 설치미술장이다.
끝없이 일렁이는 명주 모래의 아득한 천지, 사하라사막의 샌드 둔, 그 아름다운 사구들. 그걸 볼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싶어 저물어가는 나이에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지로 사막을 택한 것이다.(어찌 이리 내 마음과 같을까!)
그러나 현실의 사막은 우리가 첫사랑의 환상을 상실한 후에 정착하는 주부의 자리 같은 곳인가 보다.
(85)사막에서 야영
사막의 밤이 아무리 춥다 한들 설마 얼어죽기야 하겠는가? 설사 얼어서 죽는다 해도 무엇이 걱정인가? 살만큼 살았으니 아까울 것도없다. 사막에서는 시체가 삽시간에 건조해진다는 것도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사막은 사실 내가 죽어 눕고싶었던 가장 정갈한 자리였다.
(100)건재한 이집트의 건축물을 보면서:
모든 생물을 살리는 구원의 상징인 습기는 모든 생물을 부식시키는 치명적인 파괴의 요인이기도 하다.
생명은 파괴와 등이 맞붙은 쌍생아다. 한 신 안에 창조와 파괴가 함께 내장되어 있는 인도의 사바신 같다.
(106)백사막
백사막은 전통적인 균형의 미학에 반기를 든 모더니스트들이 마음대로 설치 작업을 해 놓은 조각공원 같다. 거기에 통일감을 주는 요인은 소재와 색상이다. 같은 돌의 하얀 석상들이 지평선까지 늘비한 풍경은 전대미문의 것이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온통 하얘서 신의 영역같은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대지가 경이롭기도 하다.
(107)백사막에서 月出 바라보기
달이 뜨니 백사막에서 끈적거리는것 같은 분위기가 싹 가셨다.깔깔한 모시같은 흰색이 품위있게 지배하는 서슬 푸른 백색의 천지. 하늘과 땅이 모두 정화의식을 치르고 난 성지같다. 얇은 사,하늘 옷을 입은 신선들이 여기저기에서 기동하는 기척이 들린 것 같은 영성스러운 분위기다. 白堊[흰흙]의 천지가 달빛을 받아 瑞氣 어린 푸른 기가 도는데 하늘에서는 또 별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별들은 지상에 하강하여 하얀 대지와 노닥거렸다. 너무 맑고 청정한 천지여서 베두인들이 쳐놓은 천막의 치졸한 원색 문양이 모독처럼 느껴졌다.
(109)백사막에서의 夜食과 朝食:
밤에는 캠프파이어에 감자를 구워먹었다.구운감자의 맛은 한국 것과 같았다. 감자맛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다. 아침에는 해가 솟는 것을 감상하면서 커피믹스를 타서 마시고 컵라면도 먹었다. 그것들은 내가 이 여행 중에 맛본 가장 맛있는 성찬이었다. 때로 결핍은 우리에게 이런 겸허한 희열을 안겨 준다.

(난 저자가, 믹스커피와 컵라면을 '가장 맛있는 성찬'이라고 표현한것은 그분의 익숙한 입맛 때문일거라고 믿고싶다. 이집트의 먹거리가 그렇게 허접했을 거라고 믿기지 않는다)
(117)다신교에 대한 작가의(?) 견해:
그들은 태양신을 야훼처럼 전능하고 無所不能한 절대신으로는 보지않았다. 태양신도 악마와의 싸움에서 질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생긴 불안이 다른 신을 수없이 만들어낸 다신교의 모체일 것이다.
神은 모레와 하늘의 무한성에서 유발된 제3의 무한이다.
(134)이집트에는 두 가지가 없다.

실리를 초월하여 예술을 아름다움자체로 사랑하는 자율적인 예술론이 없고,월계관으로 상징화되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도 없다. 지금의 이집트에 파라오의 무덤과 신전만 남아있는 것은 그 문명이 지상적인 것을 지나치게 홀대한 것이었다는 증거도 된다. 그리스가 전세계를 뒤흔든 르네상스의 모태가 되는 것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이 조화를 이룬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135)나일강 크루즈를 하면서 숨이 막히게 감동을 받는 것은 거기,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변의 수풀바로 너머에 모래산맥이 바싹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물가의 좁은 녹지대가 모래빛 언덕들과 그냥 이어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깝게 등을 대고 맞붙어 있는 풍경은 나일강 크루즈를 하는 3일 동안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 평화롭고 아름답고 조용한 세계, 나일강 크루즈를 축복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숨이 막히는 감동을 3일씩이나 맛 볼 수 있다니--기대할 만하다)
(138)사카라와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크기가 엄청난 무덤의 효시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묘지들과 델 엘 비하리에 있는 것 같은 거창한 장제전들이 그 뒤를 잇는다. 장제문화의 규모와 정교함에 있어 고대이집트를 따를 나라가 없다. 이집트인들의 무덤 꾸미기에는 기술과 정성, 예술이 다 동원되어 있다. 건축과 조각, 미술과 문학이 모두 거기 담겨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무덤은 그 나라 문명의 종합 전시장이다.
(145-146)람세스 2세
람세스 2세는 다리가 좀 부자유스러웠고, 등골이 굳어져서 생전에는 구부정한 자세였다. 그는 잇몸이 곪는 병을 앓고 있었으며 감염증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하고 지적이었다. 학처럼 품위가 있는 그의 얼굴은 철학자나시인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아주 키가 크고 날씬한 흰옷 입은 성자같은 람세스 대왕! 그는 자기가 룩소르 신전 앞에 세워놓은 오벨리스크 중의 하나가 볼모처럼 외롭게 서 있는 콩코르드 광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152-153)카르나크 신전
23m와 15m짜리 대원주가 134개나 한방에 들어있는 엄청난 열주실이 있다. 세트 1세가 기획하고 람세스 2세가 완성했다는 열주실 기둥에는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다. 신왕국시대는 고대 이집트 3천년 역사의 피크를 이루는 시기여서 조각들도 완성도가 높고 건축물의 크기도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람세스 2세, 3세와 세트 1세는 거대 취미의 본산이라 할수 있다. 피라미드로 시작된 이집트의 거대 취미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신왕국시대의 제18~20왕조 때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은 종합대학의 캠퍼스를 해도 될 만한크기이고, 람세스 3세의 장제전은 탑문의 높이가 23m나 된다.
조각도 예외가 아니다.람세스 2세가 만든 아부심벨 신전에는 같은 인물의 조각이 4개가 나란히 앉아있는데, 하나하나의 높이가 20m다. 7층짜리 빌딩과 맞먹는 높이다.산허리를 파내서 조성한 암굴 신전안에는 또 10m가 넘는 오시리스기둥이 8개나 있는 방이 있다. 산속을 파내서 만든 방의 천장의 높이가 10m를 훨씬 넘었다는 이야기다.

(167)사막의 네크로폴리스
사막은 세 가지 면에서 장제문화에기여한다.
1. 사막은 미라와 부장품들이 상하지 않게 보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2.사막은 주거지로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3.유적들을 숨기는 데 기여한다.
2천 년 동안 유물들이 무사하게 보존된 것은 모래바람의 공덕이다.
(186)투탕카멘의 시대는 전통적인 형식적 규범에 아마르나 예술의 리얼리즘이 가미되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생동하는 조각과 정교한 공예품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다. 아마르나 예술의 입김이 닿아 있어 다른 무덤의 소장품보다 선이 유연하고 예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완벽한 원형을 보존한 채로 현대에 전해진 것은 어쩌면 이집트 예술의 精華를 후세에 남기려는 프타 신의 특별한 배려였는지도모른다.
(190)아마르나 예술의 탈전통성:
1.그들의 포즈--인간의 동작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신체동작 절제'의 규범에 배치된다.
2.연령--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젊되 어리지는 말아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파라오는(투탕카멘) 소년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표범 등에 올라탄 투탕카멘

아마르나 예술은 미메시스를 목적으로 삼는 예술관에 의거한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마르나 예술이 이집트에 처음으로 도입한혁명적인 관습이다.
3..곡선의 활용--아마르나 조각들은 각이 없이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우연성과 따뜻함을 함유한다.
4.여체의 뒤쪽 곡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기법이다.

그들은 프로필에도 눈만은 정면으로 그리는 규범도 거부했다. 보이는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해서다.
5.거대 취미의 거부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여자도 남자도 대체로 실물대로 그려지거나 작게 그려진다.
아마르나 예술은 인간의 추함이나 결함까지도 그대로 재현하여 가능한 한 실물과 같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그 점을 대표하는 것이 아크나톤의 조각상이다. 아크나톤은 불뚝 나온 배에 눈은 가늘고 입술은 커다란, 자신의 불균형한 모습을 그대로 조각을 만들게 독려했다.

(193)저자가 예찬한 아크나톤:
아크나톤은 예수가 태어나기 1500년 전에 일신교를 주창한 파격적인 파라오이며 인간이 모두 평등한 피조물이라는 말도 아마 그가처음 했을 것이다. 그의 불균형한조각상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크나톤은 괴물일까, 천재일까?

(200)아부심벨 신전
람세스 2세가 태양신 아몬 라와 라호라크티, 프타의 세 신에게 바친 신전/1817년 발굴(건설 후1400년 뒤)/1960년 아스완댐 건설을 앞두고 이전 논의/1963년부터 10년간 이전 공사/ 20세기 기술 문명의 승리로 평가됨
(204)네페르타리 왕비
람세스는 소신전을 대신전보다 먼저 지음/10m 크기의 석상 6개/딸밖에 없는 네페르타리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동등한 지위로 대접했다/품위있고 영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평/네페르타리 석상은 헌신적이면서 숭고미를 지니는 부드럽고 여성적 감성을 보임

(205)람세스 2세

고대 이집트 3천년 역사를 통해 람세스 2세처럼 많은 집을 지은 파라오도 드물지만 그처럼 많은 조각을 남긴 파라오도 없을 것이다. 안정감과 충일감을 겸비한 숭고한 미적 구조물들을 창안해 낸 점에서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각들은 오시리스상으로 조각된 8개의 남신상이다./그들은 장엄하면서 발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거룩하고 완벽한 남성상들이다.

(211)아스완
물이 풍부해서 갖가지 식물을 구경할 수 있는 곳/다양한 새들을 민날수 있는 곳/람세스가 사랑한 땅 누비아
(218)이시스 신전
'이집트의 진주'라 불리는 필라에 섬에 있다/오시리스가 묻힌 비게 섬이 옆에 있다/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넥타네보 1세가 지음/아들 호루스를 안고 있는 그녀의 여신상은 기독교 성모상의 원형일 가능성이 많다./수몰 직전에 근처의 아갈키아 섬으로 이전, 완벽하게 보존됨(1972년~1980년)

(226)이집트 유산은 세계문화유산:
19세기의 이집트에서 고고학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친 외국인들이 있다. 유물 반출 금지법을 만들게 한 것도 그들이며, 스핑크스의 치수를 재고, 카르나크 신전의 폐허를 정리하는 것도 이방에서 온 이집트학자들이다. 아름다운 것,귀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은 국가를 초월할 때 더 빛을 발한다. 나폴레옹이 데리고 간 학자들과 신성문자를 해독하는 데 평생을 바친 샹폴리옹, 유물 발굴에 평생을 바친 마리에트, 투탕카멘의 무덤 자료를 정리하는 데만 10 년의 세월을 쏟아부은 하워드 카터 같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인류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234)나일강 크루즈
세인트 조지호에서 해와 달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들은 내 생애 최고의 충만한 시간이었다.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녹아들고 아름다움과 비장함이 조화를 이룬 나일강 위에서 나는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 무한이 있었다. 거기 강이 있었다. 거기 해와 달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말대로 나일강 크루즈는 너무나 크나큰 축복이었다.
(238)콤옴보 신전
투트모스 3세 때 지은 것인데 허물고 프톨레마이오스 때 다시 지음/호루스와 소베크를 모심

(241)에드푸 신전
호루스를 모심/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지어서(BC 237년 8월에 착공, 20년 만에 완공함)/그들이 지은 신전 중가장 큼/보존 상태가 좋아 더 아름다움

(243-245)대표적인 이집트 마니아들-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98)은 프랑스보다 이집트에 기여한 것이 더 많은 이상한 침략이다./그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수학자 21명, 천문학자 3명, 기술자 17명, 건축가 4명, 화가 8명, 문학가 10명, 박물학자와 광산기사13명, 그리고 라틴어,그리스어,아랍어의 활자를 가진 인쇄공 22명. 그 곁다리 손님들이 일을 쳤다./이 다양한 손님들은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머무는 두어 해 동안에 이집트학의 기초를 닦는 작업을 정착시킨다. 로제타 스톤을 발굴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나는 전쟁 영웅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지위를 이용해서 인간의 탐욕을 드러낸, 살인광이자 파괴범들일 뿐이라고-- 그러나 나폴레옹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싸우러 가면서 '이상한 손님들'을 대동하여 그의 인문학적 취향을 발휘하다니!)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내정을 가다듬는 일에 열을 올려 이집트를 살기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군용병원을 세우고 세제를 일률화했으며 학사원을 만들고 신문을 간행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하여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다고 판단해서 한 일이 아닐까?)
(251)건물들은 사라지고,비석은 모래에 파묻히고, 무덤들은 잊히되 지혜를 깨달은 서기관들은 그들이 쓴 작품의 광채로 인하여 영원히 살아남는다. 한 권의 책은 견고한 벽보다도 더 쓸모있다. 책은 네가 죽고 난 다음에도 신전의 역할을 할 것이다.--'지혜의 서' 중에서
(252)이집트 통치자 무함마드 알리:(1769~1849) 향년 80세

**위키백과엔, 통치기간이 1805~1848이고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이라고 기록됨
불가리아의 용병 출신/통치기간 (1810~1828)프랑스와 영국에 오벨리스크를 선물함/자신은 유물 뒷거래로 치부함/유적지를 도굴꾼의 소굴로 만듦/13개의 신전의 돌을 건축자재로 재활용/알리는 예술에 대해 무지하긴 했지만 이집트의 근대화를 이룬 것은 인정해야 함/'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됨
(두 번째 읽는 거지만 너무 재미있어 밥먹는 것도 잊고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자에게 감사한다.이렇게 독자를 사로잡는 책은 결코 흔치 않다.)
(255)카르나크 신전
이집트에서 가장 큼/높이 23m의 기둥들이 134개 있다./한때 8만 명이 살았고 65개의 마을과 조선소까지 있었다/

천 년을 훨씬 넘게 여러 사람의 손으로 증축한 건물이다.

(261)룩소르 신전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건물/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아멘호테프 3세 때 시공장 아멘호테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오므린 파피루스 모양의 기둥들은 디자인이 세련되었으면서도 푸근하고 매혹적이어서 룩소르 신전의 로고처럼 되었다/.상큼하고 우아하다/19왕조의 람세스 2세에 의해 완성된다./15m 정도의 기둥들이 32개 있다./기둥의 미학을 살린 이 신전은 이집트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신전으로 간주된다./이집트에 온 보람을 흠씬 느끼게 해주는 3천년 전 신전 기둥의황홀한 意匠이다

(272)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인류가 만든 가장 간결하고 아름다운 탑이다./무함마드알리는 단 두 개뿐인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하나를 프랑스 샤를10세에게 선물로 주었다.그는 답례로 시계를 받아 알리 모스크에 세워놓았다./이로 인해 이집트 5천 년 역사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왼쪽에 하나뿐인 오벨리스크

(276)룩소르 박물관
1975년 무바라크 대통령의 발의에 의해 지어짐/룩소르 신전의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 지하에서 반견된 봉헌물 수장고의 유물 중 가장 훌륭한 조각품 16개가 특별실에 전시되어 있다/하토르 여신의 좌상이 가장 아름답다.

아마르나 예술의 징후를 엿볼 수 있다(아멘호테프 3세--아크나톤--투탕카멘)
(284)알렉산드리아
이집트어로 '라코티스'/날씨,아름다운 샛강, 신선한 물,석회암 채석장, 나일강과의 접근성 등을 고루 갖춘 도시/짠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지중해의 진주/아랍의 침공으로 수도가 카이로로 옮겨짐/높이120m, 30개의 방을 갖춘 파로스등대는 지진으로 무너짐/50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시저와 이집트군이 교전할 때 불에 타 없어짐/ 그 후 천 년 간 황폐한 도시로 변해 버림/마레오티스 호의 오염/진흙으로 수로가 막힘/잊힌 도시/무함마드 알리가 45마일의 운하를 파서 알렉산드리아와 나일강을 연결한다./알렉산더대욍이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파라오가 되어
이 도시를 수도로 삼고 이집트를 다스린다.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할 떄까지 300년간.
(331)카이로
무슬림의 손으로 만든 이슬람의 도시/원래 이집트어로 '승리'라는 뜻을 가진 '알 카헤라'였다/641년에아무르장군이 이집트를 점령할 무렵에 이슬람교가 들어옴/그후 13세기 동안 무슬림왕조의 지배를 받고 아랍어가 공용어로 쓰임/그래서 카이로는 1천 개의 미너렛을 가진 도시'가 됨/툴른 모스크는 이라크 양식,알리 모스크는 이스탄불식 양식/카이로의 이슬람 지구는 세계문화유산/1952년 독립국가가 되어 나세르가 통치함
(저자는 대학교수이고 학자였다. 누구처럼 기냥 슬렁슬렁 재미로 여행을 다니지는 않는다.
구석구석 지나칠 정도로(?)자세히 살피고 묘사하고 서술하여, 출발 전 공부를 빡세게 시켜서 고맙기는 하다.

그러나 공부가 넘 고되서 이젠 좀 대강대강 넘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