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Y Family Room

친정아버지 忌日을 앞두고

맑은 바람 2023. 9. 24. 21:57

-지금 살아 계시다면 92세가 되셨을 아버지-떠나신 지 서른 해, 아버지 忌日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내가 힘들 때 가끔 꿈에 오시어 모습을 보이시더니 이제는 꿈에서 조차 뵐 수 없으니, 어느 먼 곳으로 영영 가 버리신 건가요?-

 

30년 남짓 아버지라는 존재가 내 곁에 머물다 가셨지만, 돌이켜 생각할 때 아버지의 존재가 나한테 어떤 의미였나 자문해 본다.

늘 술에 절어 몸도 잘 가누지 못한 채 밤늦게 귀가하시는 모습, 밤새 이어지는 어머니의 지청구를 자장가 삼아 주무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같이 구부정한 어깨를 뒤로한 채 일터로 나가시는 모습, 술이 얼근해서 기분 좋은 날은 따끈한 군밤이나 군고구마 봉투를 들고 들어오시곤 하던 모습--

자식들과 무릎을 맞대고 나란히 앉아 속마음을 나누거나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워 본 기억이거의 없는 옛날식 아버지 - 그럼에도 내 몸의 반쪽을 만들어주셨음에 틀림없는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는 나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우셨고 또 잠깐잠깐 행복해하셨다.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사다드렸더니 누가 이런걸 사오라고 했냐며 호통을 치셔서 난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줄 알았다. 어린 딸이 애면글면 모은 돈을, 아버지를 위해, 당장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데 쓴 일에 대한 미안함과 한편 고마움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그 뒤로 아버지는 늘 머리맡에 라디오 몸체보다 더 큰 밧데리가 달린 금성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애인인 양 가까이 두고 사셨다.

자식을 넷이나 대학졸업을 시켰지만 부모님이 함께 졸업식에 오신 건 내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졸업식장에서 기념촬영을 하시면서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거듭거듭 되뇌셨다.

니가 젤 효녀다, 효녀야!”

그 후 나는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고 서른에 뇌종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입원중인 내게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토마토에 설탕을 재서 들고 오셨다. 어서 먹어보라고 내놓고는 한동안 아무 말씀 없이 눈시울을 붉힌 채로 나를 망연히 내려다보시던 모습-그 때 일을 회상하니 다시금 나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가족들의 뜨거운 사랑 속에 나는 10만 명에 한 명 정도라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병이 완쾌되었고 그 후 30년을 거뜬히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아버지를 회상하면 늘 죄스러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겨 늘 숨기고 싶어 했던 일이다.

아버지는 당시 동아일보 건너편 광화문 쪽에서 꽤 이름난 일식집 조리사였다. 지금은 조리과학고다 뭐다 해서 성적도 어느 정도 우수해야 들어갈 수 있는 요리학교가 따로 있고 적극적으로 양성하는 분위기지만 그 옛날 만해도 남자가 음식을 만드는 일은 무척 드물었고 더구나 그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조리사라는 사실이 창피한 나는, 학교에서 학년 초에 실시하는 환경 조사 란에는 그저 상업이라고만 썼다. 친구들이 알까봐 마음을 졸이면서. 어린 마음이라 그랬지만 아버지께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에 대해서 참 지독한 분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음식을 다루는 직업이니만큼 가끔은 아버지의 솜씨를 구경시킬 법도 한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생선 한 점 들고 오거나 스시 맛을 보여준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 고지식한 성품을 유일한 유산으로 물려주셨던 것이다.

,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하시지만 술을 이기지 못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 시켜 늘 어머니 속을 태웠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별명처럼 부르던 말은, ‘태백이었다.

어느 여름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마중하러 엄마랑, 아버지가 늘 돌아오시는 길목에 나가보았다. 엄마의 예측대로 아버지는 길모퉁이에서 취한 모습으로 졸고 앉아 계셨다. 바람모지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 잠시 앉았다가 깜박하신 모양이다.

나는 화도 나고 약이 올라 아버지구두를 벗겼다. 맨발인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오셨던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신발이 없어졌다고 난감해 하셨다. 엄마와 나는 모르쇠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그 일은 기억 속에 파묻혔다. 비록 홧김에지만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인 일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버지-요새아버지들은 어느 정도 일한 뒤에 자아성취니 뭐니 하며 자기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이 됐지만 옛날 우리의 아버지는 자식뒷바라지에 한평생 허리가 휘고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사시다가 어느 날 허망하게 세상 끈을 놓아버리셨다.

불원간, 오가는 이 없어 적막하게 幽宅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찾아뵙고 소주 한 잔 올려야겠다.

 

(201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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