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 선생님>
난 지각을 잘 하는 편이었다. 나이 들어 고치고 싶은 버릇 제 1순위가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옛날보다 많이 여유로워진 지금 웬만한 약속은 10분 20분 전에 미리 약속 장소에 나가 주변을 배회하곤
한다.
가끔 생각나는 두 분 선생님도 지각과 관련된 일이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중학입시 공부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함께 과외하는 친구 공책을 빌려 갖고
가서는 다음날 지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숙제 검사부터
하시는데 친구 차례가 되었을 때 친구는 울먹이며 아무개가 공책을 빌려갔다고 말한 것이다.
뒤늦게 허겁지겁 교실로 들이닥친 나는 공책부터 꺼내들고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왜 늦었느냐고 물으시길래, 어제 과외 공부 끝나고 숙제하느라 늦게 잤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리니,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지는 게 아닌가?
“너 과외 받니? 잘됐다. 들어가라.” 어리둥절한 채 위기를 모면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에게서 들으니, 조금만 더 받쳐주면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는데 우리집 형편이 어려운 걸
안타까워 하셨단다.
진정으로 제자를 아끼는 선생님이었던 걸 알았다.
내가 직업을 갖고 나서 제일 찾아뵙고 싶었던 분이었는데, 은수저라도 한 벌 사가지고 꼭 뵙고 싶었는데 생각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담임선생님-
학기 초에 반 분위기를 잡아놓아야 한다는 선생님들마다의 지론에 의해, 우리 반은 다른 반보다 30분쯤 일찍 와서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담임선생님의 엄명이 내렸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임에도 ‘지각은 고질병’이라 걸핏하면 지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지각한 날-맨 앞자리가 내 자리라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반 친구들과 선생님의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붙을 테고 해서 차라리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양이 발로 자리에
도착하기 전에 교탁에 근엄하게 앉아계신 선생님이 드디어 폭탄선언을 하셨다.
“너는 아마도 공부도 꼴찌일 게야.”
날카로운 쇳조각이 가슴에 꽂히는 순간이었다.
그 말씀 때문에 분발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선생님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다만 나는 더 이상 내 삶 속에 그 선생님을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다.
오랜 교직생활을 한 나는 이 두 선생님의 모습 중 어느 쪽을 더 닮았을까?
내 말과 행동으로 희망과 위로를 받은 제자도 더러 있겠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날카로운
쇳조각을 날려 깊은 상처를 준 제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게 되는 이 날에, 그들에게 깊이 용서를 구하고 싶다.
2009. 5. 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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