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마음의 행로

맑은 바람 2009. 6. 30. 23:59

 

 

중학시절 나는 종로 2가 <우미관> 뒤에서 살았다.

마지막 회가 중반에 접어들 때면 매표소 아저씨는 밖에서 기웃거리는 우리들을 들여보내고 자리를

떴다. 그래서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늘 반토막 영화를 보았다.

어린 꼬마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 그 후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건

금발의 미인 마리린 몬로가 어느 장교에게 길고 깊은(?) 키스를 퍼붓자 남자가 그만 넉아웃되고 마는

'그것은 키스로 시작되었다'였다.

 

T.V.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60년대 중반의 아이들은 '헐리우드 키드'였다.

아이들은 약간의 용돈만 손에 들면 엄마 몰래 학교 몰래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

영화나 만화 같은 건 공부에 방해가 될뿐더러 '있는 집 애들'이나 보는 사치스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대한극장>은 입장료가 75원으로 '큰돈'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20-30원이면 동시상영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는 학생극장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시민회관>---

사랑의 테마 음악이 가슴을 저려오게 하는 '벤허', '물망초', 마리오란자의 '첫사랑'---

 

대한극장 건너 <아데네극장>---

'Teen ager story'의 크리프 리챠드, 앤 마가렛, 제임스 딘--모두 그곳에서 만난 우상들이다.

 

남산 밑에도 아름답고 슬픈 영화를 많이 보여주던 동시상영관이 있었다.

<드라마센타>--

'슬픔은 그대 가슴에', '슬픔이여, 안녕',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

 

또 지금의 프라자 호텔 뒤에 있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버린 <경남극장>--

그곳에서 비틀즈의 노래 'I love her'가 주제곡으로 흐르는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우정'에 공감했다.

 

또 명동에 있던 <명동극장>---

단발머리를 감추기 위해 스카프를 꼭 여미고 오바를 둘러쓴 채, 교외지도 선생의 눈을 피해 가슴

졸이며 보던 '초원의 빛'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이렇게 4시간여, 꿈과 환상 속에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화려한 삶을 살았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바깥 세상은 왜 그리 추하고 어둡고 서먹서먹한지---

 

 그러나 목에 힘주고 남녀친구들과 작당하여 대한극장엘 간 적이 한번 있었다.

교복을 버젓이 입은 채로.

그리아 가슨의 환한 미소가 눈부신 '마음의 행로'---

런던의 어느 새벽, 짙은 안개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전쟁 중에 기억상실증에 걸려 요양을 받다가 정신병원을 나오는 남자였다.

그 사나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애쓰는 옛 애인--

마침내 벚꽃이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그림같은 집의 문 앞에서 열쇠를 꽂는 순간 그 남자의 기억은

되돌아오고--

 

'사랑'은 그렇게 힘들게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2000.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