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면
서글픈 옛자췬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후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설야> 김광균
-그곳에 가면 종종 멋진 사람을 만난다.
한 달에 두 번 남산 <문학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이 있는 금요 문학마당’
오늘은 메조소프라노 김학남씨와 함께, 시 잘 쓰고 노래 좋아하고 격조 있게 술 마실 줄 아는 사람,
병상에서 임종을 맞기 얼마 전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분, 게다가 뛰어난 미식가이며 한때
한국경제계의 큰 인물이었던 <우두 김광균선생>을 만났다.
중학교 때 쓴 시가 국어선생 눈에 띄어 인정받게 됐는데 시를 잘 쓰려면 술을 잘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몇 놈이서 중국집으로 몰려가 ‘료리’하나 시켜놓고 빼갈을 마신 게 술 익히기의 시발점이었단다.
그 후 최근 20년은 아들 또래의 노재봉(전 총리, 노래 잘하고 술 좋아하고 말 잘하고 생김새까지
우리 동창 누구랑 비슷했다)을 가까이 두고 술 시중꾼에다 채홍사, 카수 역할까지 시키면서 매주
한 번씩 술자리를 했다고 노재봉씨가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좋은 시를 많이 썼지만 그 어떤 자리에서도 시인 티를 낸 적이 없다.
외모부터가 우람한(?) 체구에 얼굴이 붉으레하니 영락없는 부처님상이니, 창백한 얼굴로 줄담배
피고 다니는 당시의 시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요즈음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지상의 시인들이, 외양부터 뭔가 색다르게 보이려고 값비싼 모자를
얹고 다니거나 개량 한복 따위를 걸치고 으쓱거리고 다니는 모양을 선생은 필경 마땅치 않아 했으리라.
선생은 또 책을 무척 좋아해 자식들에게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책읽기를 강조했다.
뿐더러 법정 스님이나 이해인 수녀의 글을 읽고는 그 감상을 곧잘 편지에 담아 보내 그분들과의 교분도
두터웠다고 한다.
그 자손들이 예술계, 경제계에 꽤 이름난 사람들로 성장한 까닭은 개성상인의 피를 물려받은 데다 천부적인 재능과 학구적인 분위기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천수를 누리고 말년엔 구상 선생의 인도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영성체를 모신 후 조용히 잠들 듯 세상을 떠나셨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작가 김광균 선생이야말로 천복을 누린 ‘멋진 남자’였다
(2003.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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