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공주 알밤 줍기’ 여행 가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전화-
‘강경젓갈’도 맛보고 살 수 있는 패키지여행인데 회비가 단돈 만원이라고 호들갑을 보탠다.
듣는 순간
‘그래 가지고 여행사는 뭐가 남지?’
쥐, 고양이 걱정부터 한다.
8시 정각, 잠실 롯데마트 앞엔 여러 여행지 이름표를 이마에 붙인 관광버스들이 얌전하게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한 여행사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비교적 정확하게 출발한다.
요새 국내여행이고 해외여행이고 다니면서 보면 '코리안 타임'이 어느 고렷적 이야기냐는 듯 사람들이 정확하게 모이고 정확하게 출발한다.
일단 기분이 개운하고 좋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가이드아줌마가 마이크를 잡고 앞에서 인사를 한다.
40후반의 중년으로 목소리가 걸걸하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한마디 한다.
“이 차는 여러분을 행사장 두 군데로 모신 후 공주로 가서 알밤도 줍고 강경 젓갈시장도 들립니다.”고.
친구의 눈이 둥그레진다.
“행사장이라니 무슨?”
나는 전에 몇몇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했다.
차가 천안으로 접어들어 찾아든 곳은 사슴목장이었다.
이미 관광버스 여러 대가 주차장에 들어차 있고 우리일행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가건물 을 향했다. 건물로 들어가는 양 옆엔 사슴우리가 여러 채 있고 그 안엔 뿔이 댕강 잘린 사슴들이 빗물과 오물들로 질퍽한 채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속을 이리저리 걷거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관이 향그러운 높은 족속’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맨바닥에 앉혀 놓고 농장에서 나온 홍보요원은 목청을 돋워가며 사슴뿔의 효용을 이야기했다. 냉동실에서 꺼내온 사슴뿔의 상대, 중대, 하대의 효과를 설명하고 있으나 우리 일행은 대부분이 오십 후반의 고령자들로, 바람이나 쐬고 김장철도 다가오는데 젓갈이나 사러 갔다 올까 하고 나선 분들인 모양으로, 그 정도는 다 안다는 듯, 묵묵히 서비스로 제공되는 녹혈주 한두 잔씩 마시고 또 녹용 다린 물을 한 잔씩 고루 들면서 아무도 상품을 사는 이는 없었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아줌마가 한소리 한다.
“사실은, 사는 것보다 안 사는 게 더 어렵습니다. 나 이제 회사에 찍혔어.”
우리는 졸지에 숙제 안 해서 야단맞는 아이들이 되어 가이드의 시선을 피해 멀거니 창밖만 내다보았다.
예상이 빗나가 무척 화가 났을 테지만 이런 일 한두 번 겪었을까? 가이드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밝게 웃으며 다음 행사장 안내를 한다.
우리가 간 곳은 건강식품을 개발하고 있는 제약회사였다.
좀 전의 약장사 스타일과는 차별화된 분위기였다.
의자가 있는 강의실로 안내되어 우선 판매할 상품에 관한 정보를, 이미 공중파를 탄 TV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보여주었다. 일단 고객의 신뢰를 안고 들어가는 전략이었다.
이어서 여직원이 본사의 ‘연구원’을 모시겠다고 소개하니 장년의 남자가 들어서며 선언을 한다.
“이 제품을 꼭 사시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새로 나온 좋은 제품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모셨으니 알고나 가십시오.”
‘또 여기서 뭐 하나 사가지고 나가야 하나’
하는 우리들의 불안감을 그는 이미 훤히 알고 있기나 한 듯.
장황하기로는 사슴목장에서와 마찬가지였는데 연구원은 기염을 토하다가 갑자기
“오늘 여러 팀을 모셨는데 이번 분들은 분위기가 영 아닙니다.”
하고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
‘왜 저런 소리를 할까?’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니 일행은 조는지 듣는지 고요하게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이가 뭘 모르는구먼.’
사실은 일행은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거금 몇 십 만원을 주머니에서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듣고 보니 꼭 필요한 제품 같기는 한데~ 더구나 10개월 할부로 사면 용돈에서 지출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고-- 이걸 먹으면 틀림없이 젊어지는 것은 따 논 당상인데 말이야~’
고요히 물 위를 미끄러지는 백조가 물 밑에서 얼마나 바쁜 줄 알지 않는가?
잠시 뒤에 여직원 몇 명이 들어오더니 돌아다니면서 구매 의사 여부를 물어본다.
너도나도 슬그머니 부시럭부시럭 볼펜을 찾아 직원이 내민 신청서에 적기 시작한다.
연구원의 예상을 깨고 무려 여나믄 명이 신청서를 작성한다. 연구원은 얼굴 표정이 휙휙 바뀌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제품 시음의 기회를 준다.
아, 돌아 나오면서 나는 또한번 픽 웃음이 나왔다. 연구원의 그 ‘생뚱맞은 말’은 고도의 전략이었는지 모르겠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확 건드려 오기가 나게 하는--
다시 버스에 오른 일행은 의기양양하게 가이드에게 말한다.
“이번엔 안 찍혔죠?”
공주 밤밭으로 이동한 우리들은 제각기 2kg들이 비닐봉투와 집게를 하나씩 건네받고 산으로 올라갔다.
몸을 숙이고 부지런히 밤나무 밑으로 들어서니 탱탱한 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니 웬 밤들이 이렇게 주워가라는 듯 많이 있을꼬?’
하는데 저쪽에서
“아니, 이건 묵은 밤 뿌려논 거 아냐? 묵은 밤이네, 묵은 밤!”
나는 열심히 주워 담던 밤들을 순간 모두 쏟아버렸다. 기분이 화~악 상했다.
‘아니 뭐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런데 저만치에서 친구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반질하게 윤이 나는 거만 찾아봐. 다 올해 떨어진 밤들이야.”
다시 두리번두리번 손 발 머리가 동시에 바쁘다.
“아이고 허리 다리야~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지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이들은 없다 . 비탈길을 오르명내리명 가시에 찔리고 밟히고---
가파른 비탈길에 반질거리는 굵은 밤들이 많이 눈에 띈다. 종일 밤만 주으라면 좋겠다.
눈앞에 꽃뱀이 슬그머니 인기척을 내고 지나가고 닭의장풀들이 발밑에서 비명을 지르건만 보이는지 안 들리는지 밤줍기에만 여념이 없다.
그래봐야 2kg들이 한 봉투를 채우기 어렵다. 그저 욕심을 담는 재미가 있을 뿐이다.
더러는 배급 받은 비닐봉투 이외에 잠바 속에, 바지주머니 속에, 조끼 속에 욕심을 추가로 담고 나오다 관리인한테 다 털리고 망신당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강경젓갈시장'으로 향한다.
오징어젓 조개젓 육젓 한치젓 밴댕이젓 갈치젓--짠 줄도 모르고 종류별로 공짜 서비스를 맛본다. 젓갈 판매업소에서 제공하는 젓갈 중심의 저녁상까지 받았다. 하루 종일 수십 대의 관광버스로 2000명 가까운 손님들이 들이닥쳐 식탁을 차리다보니 식당 여직원들의 서비스가 엉망이다. 쏟아 붓고 흘리고 떨어뜨리고--내 돈 내고 하는 식사였다면 고함소리가 터져도 몇 번 터졌겠다. 그러나 어쩌랴, 공짜 식사인데다 저 아이들 온종일 얼마나 심신이 고달프고 지쳤겠는가?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어도 다 감수하고 감사해야지--
나이 들면서 재래시장의 싸구려 판매대에 가까이 가지 않는 이유는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순간 싸구려 인생 대접이고 백화점 고급 물건 앞에 서면 대접이 황송할 정도로 융숭하다. 불쾌한 상황 유발의 빈도가 싸구려 물건 앞에 있을 때 더욱 많아진다.
그러나 그것도 어줍잖은 오기(?)가 있을 때 이야기지, 이제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상대방의 행위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다만 내 기호에 더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진정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데 도움 되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만원이 가져다 준 --
(2007.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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