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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화해하지 마라

맑은 바람 2010. 3. 9. 12:11

섣불리 화해하지 마라

-예수회 송봉모 신부의 강론 ‘용서에 대해서’를 듣고-

 

2010년 3월 8일 오후 7시, 명동성당 대성전은 예수 수난 사순절 특강을 들으려는 사람들의 열기로 꽉 찼다.

앉을 자리는커녕 설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조금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강론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신부님의 모습과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었다.

 

용서와 화해-

우리 삶이 매일 죄 짓고 용서를 구하고 또 화해의 몸짓을 하며 사는 일인 것 같다.

어느 자매님이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친구에 대해 고백성사를 드렸더니 ‘용서하라’는 보속을 주시더란다.

이 자매는 그것이 친구에게 가서 ‘화해하라’는 뜻으로 알고 찾아가서 화해를 청했더니

“응. 그래, 이제 네가 네 잘못을 알았구나.“하더란다.

 

상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용서와 화해는 무의미하다.

상대방의 악습이 계속 자행될 뿐이다. 상습적인 강간범, 폭행범들의 악습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이쪽의 관대한(?) 용서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다.

‘참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오죽하면 그랬을라고. 전들 그러고 싶었겠어? 다 환경 탓이야. 내가 원인을 제공했어.’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 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 건 잘못은 잘못이다. 잘못한 당사자가 뉘우치며 반성하고 뉘우칠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화해를 청해 와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더구나 ‘화해’는 내가 잘못했을 때 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는 난 용서하기만 하면 된다.

용서와 화해의 본보기가 구약의 <요셉 형제 이야기>다.

그는 형들의 질투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갔으나 후에 이집트의 제2인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때 열악한 조건의 형들이 그를 찾았으나 곧바로 화해하지 않는다.

형들을 옥에 가두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 시험한 후에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러면 왜 용서하는가?

용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노하며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고통을 느끼더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내 안의 고통의 사슬을 끊고 평화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상대방을 용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의 원인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자책감에 시달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면서 자신을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니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의 평화가 찾아들 것인가?

그러나 나는 용서 후에도 여전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

머리로 한 용서가 가슴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