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1 아나톨리아 횡단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두꺼운 책’에 도전하기
나는 도서관이나 아는 이로부터 책을 빌리는 일이 별로 없다. 타인의 냄새가 밴 헌 책도 사양한다. 가끔 손을 베기도 하는 날선 책을 펼치고 거기에 줄을 긋고 메모도 해가며 새로운 길을 내는 일, 처녀지를 탐험하는 그 기분을 맛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즐거운 독서 체험이다. 그런데 내 서가에는 그 부피 때문에 엄두가 안나 모셔둔 책들이 꽤 있다.
<슬픈 열대>, <에밀>, <비잔티움 연대기>, <칠층산>, <성경>--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동생네 서가에서 <나는 걷는다>를 꺼내 뒤적이다가 서문 ‘편집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감칠맛’에 이 책의 두께를 잠시 잊었다.
***내 맘을 흔든 편집자의 말
-어떤 결정은 내일로 미루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된다.
-외로움은 때론 힘이 되는 법
-우리 모두에게는 떠남이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모든 걸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각 권이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임을 세 권을 쌓아 놓고야 인식했다. 통권 1323쪽-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마음 맞는 벗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심정으로 가슴 설렌다.
비포장 길을 타박타박 걷듯 읽을 것이다. 너무 자주 쉬면 리듬이 깨져서 안 되겠지만 진력나지 않을 만큼 쉬엄쉬엄 갈 것이다. 길가의 낯선 꽃도 보고 샘물에 목을 추겨가며--
요즈음 들어 왜 사람들은 새삼 걷기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이제는 문명의 이기들--버스 기차 비행기 승용차 승강기 에스컬레이터 등-구르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다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이동수단이라고 신발차밖에 없던 시절-산 넘고 물 건너 타박타박 하염없이 걷던 등하교길, 나귀에 등짐 싣고 장보러 다니던 아버지, 할아버지-새 운동화가 아까워 벗어들고 걷던 그길-이제 너도나도 문명의 이기를 마다하고 다시 그 길 위에 서고 싶어 한다.
서두에 저자는 ‘동양에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걷기 여행 문화, 장거리 여행 체계, 여행을 문학과 결부시킨 일 등이 이미 이곳 동양 사람들에 의해 실현됐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걷고자 하는 실크로드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서안까지 12,000km에 해당한다. 베르나르의 관심대상은 실크로드를 지났던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를 찾아보고 가능하면 그곳에 묵으며 그들의 생각, 감정 그리고 위기를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대상숙소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거나 시멘트를 발라 옛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게 됐다.
***작가의 말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내 목표는 순조롭게 여정을 마치고 4년 후 시안에 도착했을 때 내가 조금은 시인 또는
작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오늘날엔 평균 수명이 연장되고 사회활동이 예순 살에 마감됨에 따라 새로운 모험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은퇴와 더불어 그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 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줏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죽음은 나를 내버려 둘까? 수많은 위험-병, 사고, 폭력-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여럿이 함께 간다면 서로 기대고 돕고 격려해 주고 돌볼 수 있다. 실수를 하거나 약해지는 순간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걷는 길에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 드물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가 여행지에서 터키사람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의 대상이 되어 질문공세를 받을 때마다 느낀 것)
베르나르는 첫 권에서 1700km인 에르주름에서 가던 길을 멈춘다.
강도를 만나서도 아니고 군인의 제지를 받아서도 아니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식사 덕분에(?) 이질에 걸려 도저히 행보를 계속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엠블런스에 실려 이스탄불로 호송된다. 분통을 터트리며--
그러나 베르나르가 여행지 곳곳에서 만난 ‘착한 터키 사람들’ 덕분에, 아직 가보지 못한 터키를 훗날, 흔쾌히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베르나르에게처럼 내게 물을 것이다.
“네레데(어디서 왔는가)?”
“네레예(어디로 가는가)?”
(2010.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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