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차분히 갈아 앉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와 닿는 말-이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의 불행이고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남편을 애통해 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아내도 있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이 무슨 전생의 業인가 하며 한숨짓는 사람들 또한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혜경궁 홍씨(1735-1815, 80세)가 환갑이 넘어서 쓰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예순을 넘겨 살기도 어려운 그 옛날에 질긴 목숨 붙들고 붓을 들어 회고록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그 의지가 부럽다. 허기사 뼈에 박히고 골수에 사무친 일을 다 쏟아놓지 않고서 어찌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가 벌인 당쟁 속에서 죽고 죽이고 희생양이 나오고 하던 옛일과 지금의 政界를 보면 정치판은 예나 지금이나 그 풍랑의 크기가 다를 뿐 인간사 자체가 ‘그 욕망’ 때문에 스스로
苦海에서 허덕이는 삶 아닌가?
-조카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된 혜경궁 홍씨는 글 쓰는 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하나를 기록하고 보면 백 가지 일을 기록하지 못한 듯하다.“
10살 때 궁중에 들어오면서부터 부모님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60이 넘어서 <회고록>을 쓴 혜경궁 홍씨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文名을 날렸을 법하다.
이 책은 흥미위주의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당대의 ‘정보’를 소개하여 때로는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어느정도 주관적이기는 하나 ‘사실’의 기록이고 혜경궁홍씨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글이기도 하다.
**한중록을 쓰게 된 동기
“내 첩첩한 公私에 참혹한 재앙이 있은 후로는 목숨이 실과 같아서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이 일을 주상(순조)에게 모르게 하고 죽기는 실로 人情이 아니다. 그래서 죽기를 참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록한다.”
“이 글을 장래 내가 없는 후에라도 주상이 보시면 반드시 감동하여 내 중부(홍인한, 홍씨의 작은 아버지, 처음에 영조의 신임을 얻어 평안감사,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나 역적의 이름을 받아 참화를 입었다.) 30년 쌓인 원한을 풀어주실까 하늘에 빌고 또 빈다.”
**사도세자의 됨됨이와 성장 환경
체격과 용모가 크고 웅장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총명했다. 그러나 일찍이 부모와 멀리 떨어져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데다 나인들이 사사건건 針小棒大해서 윗전들께 여쭌 까닭에 , 방치된 상태에서
오해가 커져 훗날 메꿀 수 없는 부자간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사도세자는 집복헌에서 태어나 저승전에서 자랐으며 소주방이 된 취선당에서 만든 음식을 들었는데
이곳들이 다 괴이한 곳이다.
**‘마누라’의 뜻에 관해
오늘날 마누라는 ‘집사람’, 그래서 ‘만만한 사람, 편한 사람’으로 쓰이고 있으나 당시는 왕이나 왕비에게 쓰던 경칭이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당시 왕비로 간택되는 일은 어느 날 신데렐라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가문을
빛내게 되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듯하나 혜경궁 홍씨 집안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떠날 사람은 생이별의 눈물, 부모는 부귀영화에 따르는 재앙을 먼저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생면부지의 먼 일가친척의 줄 이은 방문은 또 무얼 뜻하나?
평소에는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 출세 줄을 잡으려고 너도나도 눈도장을 찍으려 혈안이 되는일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좋은 인연- 아지와 복례
혜경궁 홍씨가 결혼할 때 친정에서 데려온 사람들. 평생 손발이 되어 주었던 ‘아지와 복례’ 같은 인연을
만난다면 그 삶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그 侍婢들의 덕을 입었기에 후일까지 잘 지내었던가 싶다.”
80수를 누린 혜경궁 홍씨는 그렇게 적었다.
**세자빈(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그는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세자빈의 아버지가 된 죄로 노심초사, 잠 한번 깊이 들어본 적 없다.
입 조심, 행동 조심-자신뿐만 아니라 세자빈을 둘러싼 외가 사람들을 단속하고 또 챙기느라 나날이
바늘방석이었겠다. 그런데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속에 削職되는 위기를 겪었을 때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는 이 모든 걸 내다보았기에 딸의 간택을 앞두고 ‘뜻밖의 행운으로 간택에서 빠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대외용 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심각한 지경인 듯하나 혜경궁 홍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겪은 일들이 無垢하여 일일이 다 쓰려 하였지만 붓을 들어 쓸 말이 아니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 말로도 속 쓰린 사연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도세자의 죽음(임오화변)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글
“서글프고도 서글프도다! 모년 모월 일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늘과 땅이 맞붙고 해와 땅이 어두운 변을 만났으니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책의 절반에 이르도록 애통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니 마음이 먹구름처럼 내려앉는다. 뒤주에 갇힌
소조(사도세자)를 두고 친정으로 돌아온 혜경궁 홍씨-죽고 싶어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세손이 맘에
걸리고 마음이 약해 결단을 못 내리는 모습은, 절박했을 때의 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회갑잔치(1795년)에 대해
--주상께서 노인(혜경궁홍씨)의 안부를 발걸음마다 자주 묻고 길에 빛이 나며 이 몸이 영화로워 주상의 아름다운 효성을 칭송했지만 도리어 불안하였다.
--화성행궁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관현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하는데 내빈과 외빈을 성대히 부르고
회갑연에 쓰는 비단조각으로 만든 꽃은 수를 놓아 영롱하고 잔칫상의 진미는 바다와 육지의 것을 두루
겸비하였다. 우리 주상이 옥수로 금술잔을 친히 잡아 이 노모에게 현수하였다. 전에는 드물고 지금은
없는 일을 내가 몸으로 친히 당하니 귀하고 외람되기가 한이 없었다.
--허나 나의 두렵고 불안한 마음과 추모의 아픔이 마음의 기쁨을 이기지는 못하였다.
홍씨는 모꼬지(잔치)에 초대된 친척들에 대해 일일이 근거를 들어 칭송하였다. 그 세세함을 비할 수
없었다.
**한중만록 6권
<한중록> 마지막 부분. 주로 선왕(정조)의 聖德을 이야기하고 선왕이 없음으로 해서 외척들이 고난과
서러움을 당한 이야기다.
홍씨는 인물에 대한 好不好가 뚜렷하였다.
시누이가 둘 있는데, 사도세자의 누이며 사도세자를 옹호했으나 일찍 죽은 화평옹주에 대해서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토로했고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화완옹주에 대해서는, 경쟁심과 시기와 질투가 강하고 마침내 세존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악독한 인물’이라 평했다.
홍씨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존과 화완옹주와 그 아들 후겸과 영조의 복잡 미묘한 알력과
이간질과 모함과 흉계 이야기는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특히 후겸에 대해서는 “권세를 즐기고 경쟁심과 시기심이 많고 사람 해치기를 좋아한 인물로 친정아버지를 해하려고 했던 ‘죽일 놈’이다.”며 막말을 한다.
그 외에 영조의 비(정순왕후)의 오라비 귀주는 ‘16자 흉언’을 낸 ‘흉악한 놈’이라 했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피를 토할 만한 일이로다.”
<한중록>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좀 의아한 것은, 그리 아끼고 우러른 정조가 부스럼과 과로로 힘들어 했을 텐데 그 수발한 이야기와
고통을 함께하며 마지막을 지켜본 이야기가 전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기대한 것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통해서 정조대왕이 얼마나 끝까지 멋진 분이었나를 세세히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문득문득 우울에 빠뜨리는, 한여름 끈끈한 더위 같이 착 달라붙어 있는 이 근심덩어리, <한중록>의 恨과 함께, 장맛비 몰아내는 선들바람으로 떠나거라, 멀리멀리~
(2010. 7. 1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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