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주는 삶의 자양분을 가장 잘 빨아들이는 시기, 10대-
사람들은 10대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 하나씩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굽이굽이에서 부딪는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다.
1950년대 중후반, 나의 10대는 아픈 기억들로부터 시작됐다.
피난지에서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상이군인, 거지, 나환자, 전쟁 통에 자식을 잃고 실성한 여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골목 안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가는 건 예사고 지어놓은 밥을 솥 채로 들고 가기도 하는 좀도둑들이 많았지만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서로 따뜻한 밥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음식점 밖에 내다버린 복어 알을 주워다 먹고 죽거나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이 연탄불을 피워 놓고 집단 자살을 하곤 했다.
아버지가 무교동 부근에 직장을 얻게 되자 우리는 종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서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연건동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지금의 <혜화역> 4번 출구 부근인데 문간방에는 하숙생들이 살았다.
지척에 있는 서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같았다.
겨울날 무료한 때면 학생들은 나를 <참새 잡이 놀이>에 초대했다.
마당 한 가운데 소쿠리를 엎어 작대기로 세워 놓고 그 아래 쌀을 한 줌 놓는다.
작대기에 매어놓은 실을 방안까지 끌어들여 팽팽하게 당긴 다음 참새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어수룩한 참새가 소쿠리 속으로 들어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숨 막히게 긴장되었던 순간들이 생생하다.
지금 마당의 감나무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고 있는 저 참새들은 한때 저들의 목숨을 노렸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 알기나 할까?
초저녁이면 종로거리에는 <야시장>이 열렸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 펼쳐진 좌판과 리어카엔 당장 생활에 필요한 조악한 물건들과 피난을 다니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했던, 쓸 만한 물건들이 푼돈과 바꾸기 위해 나와 있었다. 딱히 소일거리가 없었던 사람들은 저녁상을 물린 뒤 아직 상가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매일 밤 열리는 야시장을 돌며 밤늦도록 웅성댔다.
지금의 <창경궁>이 <창경원>이던 시절, 봄이면 밤 벚꽃놀이 행렬이 줄을 잇고 동물원의 온갖 종류의 새와 짐승들은 아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원숭이 우리의 인기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겨울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동물원 밖으로 퍼져나갈 때면 이불 속에서도 마음은 꽁꽁 얼어 버렸다.
겨울 아침, 등교 준비 서두르라는 엄마의 재촉을 들으며 이리 콩콩 저리 콩콩 교복을 후다닥 갈아입고 나면 엄마는 양은냄비를 맏이인 내게 건네주신다.
재빠른 걸음으로 달리다시피 하여 10여분 거리에 있는 청진동 골목 안의 <청진동해장국>집으로 향한다. 뜨거운 해장국이 가득 담긴 냄비를 들고 돌아설 때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 종종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해장국 심부름하는 날은 가끔 지각도 했다.
이제는 그 새벽 골목 안을 가득 메웠던 구수한 청진동 해장국 냄새가 유독 코끝에 감도는 날이면 남편과 함께 대학로 어디쯤의 <양평해장국집>을 찾는다.
<남산>의 여름 숲은 온갖 곤충과 벌레들을 길러내서 우리들의 여름방학 숙제를 해결해 주었다. 솔숲을 헤치고 한나절 땀 뻘뻘 흘리며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매미, 잠자리, 딱정벌레와 나비들이 어느새 채집상자에 가득 찬다. 친구들의 재잘거리는 웃음 속에 여름날은 저물어 갔다.
종로2가 <우미관> 바로 뒤에 살 때였다.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극장의 커다란 간판 속의 멋진 서양 배우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동경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성년의 극장 관람은 꿈도 못 꾸던 때였지만 마지막 회 상영 시간이 10여 분 지나면 검표원 아저씨는 주위를 배회하는 동생과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제 들어가도 좋다’는- 그때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그것은 키스로 시작되었다> 등의 미국 영화를 보면서 ‘허리우드 키드’가 되어 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날의 자양분이 나를 문학소녀로, 영화마니아로 키우게 된 줄은 그 검표원 아저씨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강 건너에는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강북의 옛 명성을 내주었지만 지금은 종로도 옛것을 허물어 버리고 고층 빌딩이 쭉쭉 올라간다. 내가 살던 집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는 어딘가로 이사를 가버려 그 자리엔 낯선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순진무구하고 호기심 많던 한 소녀의 10대의 기억들은 흑백의 사진첩에 남아 삶이 허허로울 때 무심히 넘겨 볼 뿐이다.
한때 마구잡이 개발이 문제로 떠오르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청계천엔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가 뛰놀고 고궁이 복원되고 한옥 마을이 살아나면서 옛 것의 향취를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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