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지 벌써 닷새가 됐다.
이제 나이 서른넷이니 어떤 방식으로든 독립을 해야겠다고, 취직이 결정되자마자
집을 구하러 다니더니 목동역 부근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이삼 년 전만 하더라도 집을 나가겠다는 말만 들으면 눈물이 핑 돌고 그렇게도 섭섭하더니 지금은 무거운 짐 한 보따리를 내려놓은 듯 맘이 홀가분하다.
아들이 알면 서운할래나?
어떻든, 이 어려운 때에 일자리를 쉽게 구한 것 고맙고, 엄마 신세 그만 지고 나가 살겠다는 뜻이 갸륵하고, 얼른 돈 모아 결혼하겠다는 결심도 기특하고-
눈물 날 만큼 힘들고 서러운 시간을 넘어 지금에 이르니 모든 것이 고맙고 또 고맙다.
이제 나는 아들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 퉁명스런 데가 있으면서도 가끔 툭툭 던지는 유머 때문에 폭소를 터트렸던 일
* 제 기분이 내키면 묵묵히 귀 기울여 주기만 해도 주절주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아 즐거움을 주었던 일
*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면(다 큰 아들이란 어려운 존재니까~) 때론 자상하게 때론 왁왁거리면서도 꼼꼼하고 자상하게 일러 주고 고쳐주었던 일
*가끔 여자친구가 준 먹을거리 선물을 들고 와서 맛보라고 주며 여친의 존재를 확인시킨 일
*제 엄마 생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런 저런 이벤트와 선물로 기쁨을 주곤 하던 일
*엄마가 우울한 거 같으면 함께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해서 마음을 풀어주던 일
*멀리 여행 갔다가 길이 막혀 귀가가 늦으면 귀찮아하지 않고 차로 마중하러 나오곤 한 일
*야근하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또박또박 용돈을 내놓을 때 손이 부끄러워 ‘이 피 같은 돈을 어떻게 받니?’하면 ‘엄마아빠가 그렇게 절 키우셨잖아요?’하고 웃던 일
난 오늘 이토록 심성 고운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들의 소원대로 난 이제부터 아들의 부재 속에서도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꾸려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공간 속에 있더라도 아들과 엄마 사이에 좋은 기가 서로 오갈 수 있게-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가 초대받은 어느 생일파티 (0) | 2011.03.14 |
---|---|
종로통 아이 (0) | 2010.12.30 |
들국화 단상 (0) | 2010.08.31 |
목순옥, 이윤기님의 명복을 빕니다 (0) | 2010.08.27 |
‘흘러서 그침 없는’ 동인지 발간 자축연-<라 프란치스카>에서 (0) | 2010.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