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봄
이정희
우리집 베란다에 가볼래,
제비꽃부터 맨 뒷자리 파키라까지 한 가족이야
반그늘 컬러 관음죽은 큰오빠고, 진녹색 관음죽은 작은오빠야
우리 오빠들 어때?
지렁이를 키우며 살고 있어
비오는날 지렁이가 마루로 오는 철길 건너다가 창문에 치었어
파키라는 누런 이파리를 조문처럼 내걸었지
하지만 걸레질 한번에 눈물이 다 말라서 보송해졌어
그들이 낸 땅속의 길로 햇볕이 드나들고
꽃들의 비밀이 새어나오지
고무나무는 아무데나 버릇없이 기어올라 허리가 잘렸고
까칠한 소철은 가시를 내밀다가 구석에서 꽃삽을 이고 있어
여름에서 왔니, 봄이지만 아직 추울 거야
어느 집이든 햇빛 키우는 창문 하나씩은 다 있으니까 힘을 내
빗소리에서 왔니, 괜찮아 봄 다음에는 여름이야
저기 좀 봐, 유리창을 기웃거리는 그림자들
햇살이 부르면 달려가려고 푸른 발과 손바닥을 만드는 것들
세상 밖에서 더 잘 보이나봐
기후마다 다른 말을 키운다는 거 아니?
빗소리와 여름으로 이름 지은 아이야
재스민 내 방에서 오늘 자고 갈래?
축하합니다~~
오후 6시,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국제회의실>
행사 시작 30분 전, 여기저기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교과서를 통해 친숙해진 정일근 시인이 올해의 <김달진 문학상> 수상자로 뽑혔다.
나의 고래를 위하여
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나의 知人 이정희씨는 二十星霜 쌓아온 내공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올해의 <서정시학> 신인상을 거머쥠으로써 당당히 詩人의 班列에 올랐다.
남들은 하나둘 활동을 접어가는 나이에,
이정희 시인은 生動感 넘치는 筆力으로 세상을 향한 또 하나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심사위원 오세영 교수도 그렇게 말했다.
“시가 아주 젊다고!”
가운데가 오세영 심사위원, 이정희 시인
시가 맺어 준 친구들
세월의 이끼로 더욱 푸르러진 가슴
힘들고 지친 영혼들
늦가을 은은한 국화향으로 채워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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