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기억 저편-효제동 골목 사람들

맑은 바람 2016. 2. 3. 17:44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여섯 차례 이상 거듭됐는데도 크게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종로5가 주변과 효제동, 연지동, 대학로가 있는 연건동이다.

 

종로 5<광장시장>(50년대는 기냥 동대문시장이라 했다)은 이제 관광객의 名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연지동 <연동교회>120년 역사를 자랑하고 의연하게 있다.

이화사거리에서 서울대학병원 쪽으로 <창경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모교인 昌慶

<창경원>과 함께 사라지고 혜화동로터리 혜화성당 옆의 <혜화유치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50년대 중후반의 내 유년의 생활공간이자 놀이터였던 종로5가 언저리-

피난살이에서 돌아온 이들이 집 없이 전셋집을 떠돌다보면 한곳에 6~7년씩 살게 되는 일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효제동 골목 사람들> 기억이 어제런듯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나지막한 초가집이거나 판잣집들이 즐비했을 때, 길 건너 서양풍의 빨간 벽돌로 우뚝 선 <연동교회>

주일날이거나 부활절, 크리스마스 때면 낭랑한 종소리로 날 불렀다.

 

연동교회 계단

 

내가 사는 골목 입구엔 한약방이 있었다.

허여멀겋게 잘생긴 주인 남자는 한의사였고 그 아내는 어린 나에게 미인상을 심어준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훗날 자유당 시절 그 남자는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나는 그 집 안방에서 사람소리 나는 작은 상자를 처음 보았다.

라디오였다. 그걸 보려고 그 집 안방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다.

 

골목 안 중간쯤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방 한 칸에 쪽마루 약간, 부엌은 문이 따로 없어 엄마는 한 데서 밥을

지었다. 그래서 가끔 다 지어놓은 밥솥을 동냥아치가 답삭 들고 가버려 낭패를 보는 일이 있었다.

당시는 6.25 직후라, 옷고름을 풀어 헤친 미친 여자, 쇠갈고리를 번쩍번쩍 쳐들어 위협하는 상이용사,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거지들이 쌔고 넘쳐 골목길에 내건 빨래들이 마르기도 전에 사라지는 일이 잦았다.

특히 우리들 입히려고 몇 날 며칠을 뜨개질한 505표 털실로 짠 스웨터가 사라진 날이면 엄마는 종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겨울 아침이면 먹성 좋은 6.25둥이 남동생은 눈을 뜨자마자 마루 한쪽에 놓인 사과궤짝에서 차가운

국광을 꺼내다 아삭아삭 씹어대, 나를 잠결에서 불러내었다.

두 살 위인 오빠는 늘 말이 없고 점잖아 나의 관심 밖이었고 두 살 아래 남동생은 내 속을 많이 태웠다.

여름날 딱총용 화약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 부벼 대는 바람에 옷에 불이 붙어 손을 데어 날 혼비백산하게 했고,

겨울이면 밥시간이 되도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찾아 나서면 영락없이 효제국민학교 변소 간 앞에서 팽이를

치고 있었다. 오줌물이 흘러나와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그래도 시장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만만한 동생을 데리고 사거리 찻길 가에 나가 나란히 앉아,

럼통 위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훤칠한 헌병을 넋 놓고 바라보며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남동생과 늦둥이 여동생, 나

뒤란으로 돌아가면 공동 뒷간이 있고 그 옆에 널찍한 마루방이 있는데 조신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혼자 살았다. 사람들이 첩년이라 했다.

덩치가 좋은 중늙은이가 가끔 들락거리는데 그 남자가 오는 날이면 여자는 햇볕 찰랑거리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신기하고 재밌어 하며 들여다보는 내게 말도 걸며 온갖정성을 쏟아 화장을 했다.

엄마 말로는 시작했다 하면 두 시간이란다.

서방질하는 년이 먹고 할 일은 그 짓밖에 없으니까--’

 

우리 집 옆에는 그 골목 안에서 제일 잘사는 집이 있었다.

넓은 마당에 화초도 많고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식구도 많은데다 종로2가 어디쯤에 <자양당>이라는

떡집을 차리고 모찌떡을 팔았기 때문에 떡 만드는 일꾼들이 많아서 그랬나 보다.

내가 그 집 떡을 당시에 먹어보았는지 어쩐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집에 나랑 동갑내기 삼이라는

딸이 있어 그 아이와 길에 나가 플라타나스 나무 사이에 고무줄을 매놓고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걸핏하면

싸움을 해서 엄마가 중재하러 나타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아이에게 공주과대접을 제대로 안 해 준 게 늘 화근이 됐던 모양이다.

 

삼이네 옆집엔 당시 아들 富者집이 있었는데 자그마치 7형젠가 8형제나 되었다.

브라질 이민을 간다는 얘기가 떠돌더니 어느 날 그 집이 조용해졌다.

지금은 브라질 이민 1세대로 돈도 많이 벌어놓고 자손들이 번창하며 잘들 살고 있겠지~~.

 

막다른 골목집에 선생님이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그분은 늘 옆구리에 서류가방을 끼고 다니는데 언행이 점잖고 밤늦도록

방의 불을 켜놓았는데 울 엄니는 그 선상님이 공부하느라 그런 거라 했다.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그런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골목 오른쪽은 이렇듯 알록달록한 빛깔의 삶들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미군부대가 있었다.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이쪽 사람과 저쪽 미군들은 종종 씨레이션 박스로 소통을 했다.

미군이 헬로 하며 건네주는 양철로 된 동그란 통을 열면 난생 처음 보는 야릇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 과자, 사탕, 소시지, 그리고 핥아보면 혀에 번져나가는 쌉싸름한 향내가 나는 진갈색 가루-

지금도 가끔 깡통 속 커피 맛이 그리워질 때면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그때 그 깡통은 엄마가 반짇고리로 수십 년을 쓰고 있었다.

 

골목 밖, 좀 떨어진 곳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집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다.

孤兒인데 주워다 기르는 거라고 사람들이 수근댔다.

신기하게도 지금도 그 자리는 아직 주차장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그때 그 소년이 주차장 주인이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번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다.

 

이제는 그때 골목 안에서 달박거리며 때로는 달달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삶을 이어왔던 이들이 절반 이상

떠나고 사라지고, 몇몇은 이렇게 남아 당시를 곱씹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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