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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2부--2 크레타/파리

맑은 바람 2020. 4. 21. 14:18

<크레타>

(418-419)요하임 신부가 했던 말:

속세로 돌아가요. 지금은 속세가 수도원이니 그곳에서 성자가 되어야 해요.

크레타는 홍수와 가뭄과 가난과 질병과 터키인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이 지속되는 곳--게으르고 거짓된 수도원의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나는 대지의 뜻을 거역하고 수사가 되어 배반하려 했다니!

 

어느 크레타노인의 말--천국의 문앞에 네가 나타났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문을 두드리지 마라.어깨에서 총을 내려 쏘아버려.

나-정말 신이 겁을 내고 문을 열어 주리라 믿으세요?

노인-아냐, 신은 겁을 내지 않아. 하지만 네가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문을 열게 되지.

농부들에게서, 특히 투쟁을 끝마친 노인들에게서 들었던 그토록 심오한 얘기들을 나는 교육받은 사람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422)백세 할아버지와의 대화: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니 백 년을 사셨다더군요. 백 년을 살고보니 인생이 어떻던가요?

-얘야, 인생이란 냉수 한그릇과 같더구나.

-아직도 목이 마르신가요, 할아버지?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424)프란체스코 성인의 기도: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저는 지옥으로 내려가 저주받은 자들을 위로할 질서를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면 저희들은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카잔차키스는 평소 나의 생각을 꼭 집어서 속시원히 말해준다. 특히 종교관이 똑같다.내가 제대로 글을 썼더라면 이와 같이 썼으리라)

 

(430)나는 사무실의 네 벽 안에 절대로 갇히지 않고, 편안한 삶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필요성과 절대로 계약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자주 항구로 내려가 바다를 보았다.바다는 자유의 문 같았다. 오, 그 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430)아버지의 생각:

--숲속의 새 두 마리가 손에 잡은 새 한 마리보다 좋아보이는 모양이야.

꼭 젊음의 샘을 찾겠다며 세상의 끝까지 찾아가는, 동화에 나오는 미친놈 같아.

--거지같은 포도원이나 , 건포도나,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이 다 뭐야!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거둔 모든 수확이 종이와 잉크가 되었으면 좋겠어! 난 그 애를 믿으니까.

--보아하니 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야.해적이었던 우리 아버지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배들을 쳐부수고,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재산을 모았지. 넌 뭐야! 넌 무슨 배를 쳐부술 생각이냐?

 

<파리--위대한 순교자 니체>

(437)니체에 대한 나의 견해:

위대하고 격렬한 투사인 그리스도의 적이 나를 기다렸다.

처음에 그는 나를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다. 교만과 뻔뻔스러움, 굽힐 줄 모르는 이성, 파괴하려는 광포한 분노, 냉소와 비웃음, 사악한 웃음은 물론이고 , 악마의 발톱과 독아, 날개도 뚜렷하게 그는 무엇이나 다 갖추어졌다.

 

나는 그의 작품에 탐닉했다.

--나는 그리스도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적이 투쟁하고 괴로워하며 때로는 절망의 순간에 그들의 얼굴이 똑같아 보인다는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살다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말은 불손한 모독이요, 초인은 신의 암살자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 반항아는 신비한 매력을 지녔다. 그의 말은 어지럽게 도취시키는 유혹의 마술이어서 심장이 뛰게 만들었다. 정말로 그의 사상은 인간과 초인의 비극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의기양양하게 울려퍼지는 찬가 같은 디오니소스의 춤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의 시련과 혈기와 순수성을 숭배했고 그리스도의 적이었던 그 역시 가시 면류관을 쓰기라도 한 듯, 그의 이마에 흩뿌린 핏방울을 숭배했다.

 

(438)나는 이해와 자비와 공감을 차례로 거치는 사이에 증오가 사랑으로 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그토록 실감나게 경험했던 적이 없었다. 선과 악이 싸울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선과 악이 전에는 한몸이었다가 갈라졌고 이제는 다시 만나려고 투쟁하는 것처럼 여겨졌다.하지만 완전한 화해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올 것이니 적을 인정하고 또한 <코스모스>라 일컫는 위대한 종합에 스스로 참여했음을 인정할 날이 틀림없이 오리라.

 

(439)니체를 찬양함:그대는 너무나 상냥하고 온순했으며 너무나 가난했고 너무나 명랑했기 때문에 이웃의 늙고 작은 여인들은 그대를 성자라고 불렀다.그대는 지극히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불쾌하지 않게 독립하고, 조용한 비밀의 자부심을 간직하고, 근심이나 걱정없이 잠들고, 술을 피하고, 초라한 음식을 스스로 장만하고, 별나거나 귀찮은 친구는 사귀지 않고, 여자들을 쳐다보거나 신문을 읽거나 명예를 찾지 않을 터이며, 가장 훌륭한 인간들 하고만 사귀고, 훌륭한 자를 찾지 못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벗삼기로 마음 먹었다.'

니체의 영원 회귀사상:내 삶이 비록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언정 그래도 삶이 거듭거듭 수없이 되돌아오기를 비노라.

 

(440)아직도 젊음과 정열이 넘치던 그대는 마음을 진정시킬 자를 골라내기 위해 끈질기게 모든 영웅을 심문했다.그러던 어느날 그대는 북부의 브라만 쇼펜하우어를 만나게 되었다.그의 발치에 앉은 그대는 삶의 영웅적이고 절망적인 면모를 찾아냈으니---세상은 내가 창조했으며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물은 거짓된 꿈이다.

맹목적이고,시작이나 끝도 없으며 목적도 없고, 무관심하며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이지도 않은 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고 운명은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종교와 도덕과 위대한 사상은 비겁한 자나 백치들에게나 어울리는 무가치한 위안이다. 강한 자는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차분하게 세상의 목적없는 주마등같은 광경을 맞고, 다수의 형식을, 마야의 덧없는 베일을 벗기며 기뻐한다.

한창 젊음이 꽃피던 어느 날, 쇼펜하우어 다음으로 길잡이 노릇을 했고 그대의 평생에서 가장 가혹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던 바그너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대의 영혼은 영웅적 아픔으로 넘쳤다.

 

(451)나는 어릴적 성자들의 전기를 읽을 때에도 그토록 정열을 느끼며 성자의 삶을 살았던 적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골고타로의 순례가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 파리로 왔고 내 감정은 달라졌다. 위대한 무신론자인 순교자의 고뇌에 너무나 깊이 공감했고, 옛 상처들이 너무나 심하게 쑤시기 시작하여 나는 그의 피투성이 발자취를 따랐으며, 이미 건너온 다리들을 감히 파괴해 버리고는 지루한 절망과 용맹성의 터전으로 완전히 홀로 들어가지 못하는 비겁하고,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삶에 대해서 수치를 느꼈다.

선지자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무엇을 하라고 우리들에게 말했는가?

그는 우리들에게 신과 조국과 도덕과 진리를 모두 부정하고 따로 홀로 떨어져 오직 우리들의 힘만으로 우리 마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만한 세계를 이룩하라고 말했다.무엇이 가장 위험한 길인가?

나는 그것을 원한다! 심연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나는 그곳을 향해서 간다.무엇이 가장 용감한 기쁨인가? 철저한 책임감에 대한 의식!

 

(455) 나의 젊은 시절 중 가장 중대하고 가장 굶주린 순간에 니체는 나에게 견실하고 용맹한 자양분을 주었다.

비겁한 자와 노예가 된 자와 서러움을 받는 자로 하여금 위안을 얻어 주인 앞에 참고 머리를 조아리며 현세의 삶을 인내하게끔 만들기 위해 내세의 보상과 벌을 심어놓은 종교는 얼마나 교활한가.

현세의 삶에서는 하찮은 것을 내놓으면서 내세에서의 불멸이라는 재산을 주도록 알량하게 계산하는 주님의 계획서 같은 종교는 얼마나 약삭빠른가!

그렇다, 천국을 바라거나 지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리가 없다.

악마적인 교만의 산들바람이 내 이마를 스쳤다.

인간이 모든 투쟁과 모든 희망을 받아들이고, 신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으며 혼돈에서 질서를 끌어내어 그것을 인간이 조화로 변형시킬 때가 왔다고 나는 불손하게 선언했다.

 

(457) 가장 소중한 친구들과, 다짐받았던 희망이 나를 저버려 어려운 순간들에 직면할 때면 나는 얼마나 자주 눈을 감고 이 쪽배(꿈속에 본,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배)를 상상하곤 했던가?

 

(458) 어린 시절의 순박한 안락함과 고지식함은 영원히 가버렸다. 나는 천국이 침묵과 무관심으로만 가득 찬 암흑의 혼돈임을 깨달았고 무덤으로 내려갈 때 젊음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았으며 내 영혼은 더이상 비겁하고 즐거운 희망이 제공하는 위안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리에서 장기투숙을 했을 때 주인여자의 항변: 여자는 커녕, 맙소사! 친구도 없이 그렇게 고지식하고, 말도 없고, 혼자만 지내다니! 당신은 틀림없이 병자예요. 그래요, 당신은 병자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뭔가 꿍꿍이수작을 꾸미는 인물이겠죠.

(사람들은 뭔가 자기들과 달라보이는 사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왕따는 순간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대로 사는 일은 외롭고 때로 괴롭다)

 

(464) 나는 인간의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모든 종교가 단순히 겁많고 참된 인간답지 못한 자들의 도피처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길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인지 아니면 천국이란 우리가 지닌 열망의 되비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눈치 채거나 깨닫지 못하게끔 굉장한 약삭빠름과 기교를 발휘하여 불멸성과 천국을 약속하면서, 잘 꾸며낸 동화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었다. 천국에 관한 진실은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야 판단하게 될 텐데, 죽은 자의 나라에서 돌아와 우리에게 진실을 얘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이런 소리를 자주 했다. 그러나 내 가까이엔 '믿음이 강한' 친구들이 많아서 내 생각을 꽁꽁 감추고 지낸다. 그런 말을 내뱉는 순간 그들은 나를 사탄의 유혹에 빠진 자로 취급하고 가까이하려 들지 않을 게 뻔하니까.)

신을 죽여 버린 니체를 위해 만세를 부른다. 내가 원하던 바는 그것이라고 말할 용기를 나에게 주었던 사람은 그였다!

 

(466)영원회귀가 그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로 생각되었으며, 두려움에서 그는 위대한 희망을, 미래의 구세주를, 초인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초인은 또하나의 천국, 가엾고 불행한 인간을 기만하고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견디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신기루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