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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기행 곽재구

맑은 바람 2020. 8. 8. 23:44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2002년10월 9일 발행/299쪽/열림원
곽재구(1954~ )
광주출신, 대학교수, 시인
<사평역에서>로 등단

(22쪽) 구룡포가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구룡포의 골목길들. 한번 들어가면 출구가 어딘지 쉬 짐작이 안 되는 길들---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삶의 시간들이 피워내는 가장 따뜻한 형상의 꽃들이 동해의 푸른 물살과 수평선 위에 펼쳐진다.

구룡포의 방파제는 길다. 외지에서 온 여행자는, 이 방파제는 바다로 뻗어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된다.
파도와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 꽃처럼 발밑에 쌓이고 갈매기들의 비상은 색종이처럼 머리 위에서 쏟아진다.

(스물일곱 그때 탄성을 지르며 바라보았던 바다, 함께했던 사람들의 추억들이 파도소리처럼 가슴 속에서 밀려온다. 머잖은 날에 꼭 다시 그곳 바닷가와 수상한 골목들을 찾아보리라)

 

(30쪽) 길 위에 시간이 펼쳐지고 시간 속으로 길들이 이어진다. 눈앞에 걸어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시간들이 펼쳐져 있는 사실만으로 여행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35쪽)선유도:세상에서 가장 넓은 메모지/모래들은 빛났고 파도소리들은 푸르렀다.
(37쪽)장자도, 선유도, 무녀도 세 섬은 두 개의 다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 세 섬 안에서 자동차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섬안의 길들과 두 개의 다리는 오로지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보행을 하는 여행자에게 이 섬은 최고의 낙원이다.
(45쪽)한려해상 국립공원
1010번 도로의 동화마을
저문 뒤에도 길을 묻고 또 물을 수 있는 사람, 나이들어 몸의 털이 희어지고 뼈사이로 바람숭숭 드나드는 귀신의 시간에도 길을 물을 수 있는 사람, 어디선가 떨어진 별똥이 꽃을 피워 올리리라는 생각에 어제도 내일도 잠못들고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좋습니다.
(48쪽)離家樂: 집 떠나는 즐거움 / 여행 떠나는 즐거움
**畵文行脚: 정지용이 1940년 1월 영하 30도의 추위에 10일간 북방(평북 선천, 의주, 평양, 중국단동의 오룡배일원)여행을 다녀와서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
(49쪽) 知世浦: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삶의 원칙과 슬픔과 근원의 뼈아픔들을 다 알고 있는(?) 포구
(61쪽) 어청도;물이 귀한 곳/ 1912년 3월 조선총독부 시절 설치된 등대가 있다.
(79쪽) 정자항의 멸치잡이배:
멸치가 풍작이라 갈매기들은 뱃전 밖으로 튀어나온 멸치들을 낚아채 공중으로 날아갔다.
배 한 척마다 선원들이 늘어서고 그 주위로 무슨 꽃이파리처럼 사람들이 우 모여서고 멸치가 길밖으로 튀어나오면 환호성을 올리고, 갈매기떼들이 카퍼레이드의 색종이처럼 펄럭이며 날고--
영감들이 은회색 멸치빛을 띠고 사람들 속을 붕붕 날아다녔다.
(84쪽) "뱃사람들 일은 독하게 하는데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어요. 물 한 잔 내놓을뿐인데 너무 고마워해요.
술요? 그 사람들 일이 너무 힘들어 술 못해요. 다음날 새벽이면 다시 멸치잡이에 나서야 하니까요."-찻집마담의 말
얼핏 단정해버린 낮의 풍경들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88쪽) 구만리로 가는 91도로변의 파도소리:파도소리가 귀에 부시다. 이곳 길 위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봄언덕에 무더기로 피어난 조팝나무나 산당화의 꽃사태를 대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강사리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유독 맑고 고왔습니다. 한시간쯤 강사리의 파도들과 모래들 속에서 보냈습니다.맑고 빛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큰 기쁨입니다.
(89쪽) 시가 뭐냐고?
맑은 거지. 수평선 끝에서 빛나는 햇살 같은 거.
영원히 바닷물을 푸르게 하는 신비한 염료같은 거.
(91쪽)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93쪽)대보리 땅에 아주 잘생긴 등대 하나가 서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수십리 밖 어두운 바닷길을 밝힌다는 이 등대의 불빛을 오래전부터 보고싶었지요. 이번 여행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답니다.
밤을 새워 파도소리를 듣고, 등대의 불빛을 보고, 제일 먼저 육지에 닿아오는 아침 햇살을 맞고--
(94쪽)갈매기의 눈빛:
깊은 지혜와 사랑이 충만된 현자의 눈빛--세상의 모든 갈매기들이 다 동일한 눈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먼 바다의 푸른빛, 동경, 긴 항해, 자유로운 비상. 그것들이 갈매기의 눈빛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런지요.
이승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눈빛이 갈매기의 그것을 담아낼수 있다면--
(119쪽) 요즘 나는 시를 쓰지 못한다. 어디선가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어디선가---나는 그 장소를 알고 있다.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날개는 내 숨은 의지에 의해서 꺾여진 것이다. 삶을 위해 삶의 가장 소중한 빛을 지워버린 것이다. 바라볼수록 쓸쓸한 그빛--
(125쪽) 화포포구: 벌교가는 17번 국도
보리피리를 불며~
맛조개를 캐며 사는 사람들.
철새와 사람들이 조개를 놓고 다툼
(136쪽) 거차:순천만에 자리한 작은 갯마을. 팍팍하고 거친 삶이 있는 곳.** 작가가 스무번쯤 다녀간 곳
여기서도 맛조개를 채취한다.
(140쪽) 갯가에는 나와 밀물만 남았다. 밀물의 포말 위에 덧칠해지는 저녁햇살이 왠지 가슴 아팠다.
산다는 것, 밥을 먹고, 시를 쓰고, 노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자유와 정의의 획득을 위한 얼마쯤의 투쟁을 하고, 주말엔 한 아낙과 새끼들의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가고--아아, 왠지 그런 모든 풍경들이 다 쓸쓸하게 다가왔다.
(143쪽)(통발 속의 쥐가 무사히 빠져나갔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그 아침, 거차를 떠나며 나는 이상한 삶의 원기를 느꼈다. 밀려오는 파도의 물살마다 뜨겁게 새겨지는 햇살들.
불기둥처럼 내 가슴 속으로 밀려오는 그 햇살들의 광휘 속에서 나는 다시 내가 써야할 시의 체온을 느꼈고, 기꺼이 세상의 톱니바퀴 속으로 다시 맞물려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146쪽) 꿈들의 공통점은 다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루어지는 순간 이미 그것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꿈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또 새로운 꿈을 꾸기 마련이다.나는 이제 내가 여태껏 이루지 못한 꿈들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다. 꿈은 지니고 있는 데서 그 자체의 광휘가 빛난다.
오늘 나는 거차에서 또 하나의 꿈을 꾼다.그것은 이곳 바닷가 어딘가에 개펄이 잘 보이는 장소를 잡아 쓸쓸한 여행자의 영혼이 하룻밤쯤 쉬어갈 수 있는 집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어쩌면 이 꿈은 이루어질 것만 같다.
(151쪽) 은적암: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가 세운 암자. 물빛 하염 없이 착하고 소나무 향기 치렁치렁한 이곳. 돌산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동백나무, 후박나무,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나라안 절집 중 가장 작고 낮고 허름한 일주문이 나타난다. 그래서 가장 마음 편하게 들어설 수 있는 그 문을 들어서면 곧장 경내다.
(153쪽) 절집에 들러 가장 행복한 일은 머리깎고 속세와 절연한 그들이 정한 손으로 달여내는 차 한잔을 마시는 것. 새소리를 들으며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155쪽)
별과 친구가 되고 싶네요.
깡충 뛰어도 닿지 않네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됐다 됐다
별이 내려와 악수해 조요
-돌산초등학교 대신분교 2학년 샘물반 장유정

 

(157쪽) 저물 무렵 임포에 닿았다. 마을 입구엔 500년 된 동백나무가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장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향일암에 오르면 눈앞의 바다에 펼쳐진 퐁경이 임포마을(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166쪽) 회진포구의 건화다방: 톱밥난로가 타는 추억의 다방
**회진 장터의 팥죽집: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준임의 팥죽집. 밑반찬으로 반지락젓무침과 고구마순 무침은 깊고 우아한 맛을 지녔다.
그에 더하여 김준임의 삶의 자세가 팥죽의 맛을 더한다.
**회진항: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읍

(175쪽) 오랫동안 바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들 속에 서 있으면 지상의 모든 쓸쓸한 것들의 얼굴이 보였지요. 생각하면, 바람보다 더 쓸쓸한 존재들도 없겠지요. 흔적도, 꿈도,미래도, 빛깔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176쪽) 서방세계로 망명했던 솔제니친이 박해가 따를지도 모를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스텝의 풀 냄새가 너무 그리웠다고, 더 이상 그 풀 냄새를 떠나 살 수는 없노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181쪽) 나로도의 구룡금 마을:
'구룡금'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갯마당, 바지락과 석화로 유명
(186쪽) 왕포, 빛이 있는 마을: 변산반도에 있는 갯마을, 서해안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
부안공동묘지에서 기생 매창과 소리꾼 이중선의 묘를 봄,
내변산의 직소폭포의 절경은 말을 잊게 한다.
(196쪽) 전북 고창 상하면 구시포:

733번 도로변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 구시포(아홉 개의 도시를 먹여 살릴 마을)의 옛 지명은 '새나리불똥'(새 갯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앞 바다가 칠산바다인데 물 반 고기 반 말 그대로 조기떼로 뒤덮인 바다였다. 개펄 또한 서해안 개펄 중 가장 광대하다.
이곳에 해당화가 일품. 당뇨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어느 사이에 멸종됨.

(우리집 뜰에 올해 새로 자리잡은 '금화규꽃'도 천연 비아그라라는 소문 때문에 씨가 말랐었다 한다)
넓은 모래사장이 인상적.***가보고 싶은 곳!

 

(208쪽) 제주일주도로:12번 국도, 전장 181km
(213쪽)남제주군 대정읍 사계포 앞바다는 화가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혼이 쓸쓸하게 고여있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외국에 소개한 하멜이 표류한 땅이기도.
김정희의 경구:卍休(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이곳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함

(216쪽) 牛島:이곳의 물빛은 판연히 달라 흡사 시퍼런 유리와 같았다. 산호모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다.
(232쪽) 제주도 조천: 이곳에 戀北亭(이곳에 부임하거나 유배온 신하들이 임금을 그리워하던 곳)이 있다.

(239쪽) 서해대교: 세계에서 9번째로 긴 다리 7310m (출발점)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서해대교-충남당진군 송악면 복윤리(종착지)
(244쪽) 바람아래해수욕장: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한 풍경
바람이 불어가고 바람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희미한 꿈이 보였다. 갈대들이 바닷물 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의 미세한 모래언덕은 지상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들의 가루의 퇴적인지도 모른다.
아시는가 그대, 구름이 많은 날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람 아래 세상의 뭇 삶들의 꿈은 기실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람 아래, 바람 아래, 강둑 그곳에는 아주 평온한 거울 속의 봄바다가 산다.
(248쪽) 지심도:사천시 실안이라는 오래된 동네의 언덕배기에 있는 선이여관은 바다전망이 화사했다.
늑도의 불빛이 가장 아름다움.
거제대교-1018번 지방도로-나는 길을 아껴가며 달렸다.
여행자가 길 위에서 길을 아낄 때 그 여행은 행복하다.
도장포마을(거제해금강, 소금강)-14번 국도-학동 몽돌해안-구조라-지세포 해안-장승포항-지심도('땅의 마음', 동백섬), 온 섬이 동백나무
(256쪽) 남해의 푸른 바람과 싱싱한 햇살을 머금은 동백꽃들이 나무숲 가득 피어있는 모습은, 여행자에게 아름다움이란 먼 곳의 불빛이 아니라 살아 가까이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빛과 체온이라는 느낌을 지니게도 한다.
(260쪽) 비인반도:지도에 없는 이름. 21번 국도
춘장대 해수욕장, 동백숲, 남촌포구(햇살 포근하고 물살 또한 잔잔한 이곳엔 작은 지갈밭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261쪽) 서거정이 표현한 비인팔경: 隱映小島(가물거리는 섬들의 그림자), 微薄大海(새벽빛 속으로 펼쳐지는 큰 바다)
**庇仁:'모든 잘못을 덮어주고 오로지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
서천과 보령사이의 부사방조제가 있다. 4km 가까운 길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
(268쪽) 서천군 장항:
금강하구둑에서 장항읍까지 이름난 카페촌이 있다.
장항읍은 군산과 함께 한때 번영을 누렸던 곳
전군가도는 국내최초의 포장도로-일제강점기 쌀의 수송로로 쓰임. 군데군데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음.
도선장에서는 금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질 무렵, 충분히 피곤해진 강물들이 서해의 품에 말없이 안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군산항과 장항항은 배로 15분 거리에 있다.
(282쪽)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아파하고--그런 시간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빛과 희망, 꿈, 무지개---우리가 아름답다고 믿어온 모든 의미들조차 대기의 한 질료에 불과한 것인가.
(284쪽)해남 송지 어란포구:
해남길 13번 국도에서 813번 지방도로를 바꿔타고 10km거리에 어란포구가 있다.
於蘭은 '늘어진 난초형상'의 뜻이 있다고. 가만히 있어도 먹을 것을 다 가져다준다는 말뜻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난한 마을이었제. 전답은 없고 바다만 덜렁 찼는데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가난했제."
80년대 초까지는 삼치어장, 그후로는 해태양식으로 삶을 꾸림.

(290쪽) 바람처럼 이곳 바다에 섰네
어깨너머로 본 삶은 늘 어둡고 막막하여
쓸쓸한 한 마리 뿔고둥처럼
세상의 갯펄에서 포복했었네
----
봄가뭄 속에 별 하나 뜨고
별 속에 바람 하나 불고
산수유 꽃망울 황토언덕을 절며 적시느니

(젊은 날에 밑줄쳐 가며 읽었던 이런 구절이, 이제는 짠맛이 빠져나간 오이지 같은 맛이 나는 건 나이 탓일까, 나이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