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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진찰 -이장규 수필집

맑은 바람 2020. 7. 22. 14:18

범우사 267쪽 1986년 3월31일 초판 3000원

이장규1926~1985(59세) 폐암으로 사망
서울의대내과교수, 윈자력병원장, 1974년 최초수필집 출간

'70년대 후반에 작가의 글를 접하고, 의사가 쓴 글이 참 좋구나 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반세기 만에 다시 만나는 이장규 수필집--에세이보다는 미셀러니쪽에 가까운 글이지만 인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그의 이력을 보면 일찌감치 세계여행을 많이 다녔다(미국-필리핀-일본-서독-유럽-캐나다-모나코-이탈리아-싱가포르-오스트렐리아--)
출생에서 사망까지 남보다 윤택한(?) 삶을 누리며 한국 최고의 지성을 자랑한 그의 이력이 부럽다. 다만 선천적인 약골인지, 일을 너무 해서인지 병원신세를 종종 지고, 이도 부실한데 술을 즐기고 담배는 골초인 얘기를 읽으니 의사인 그가 뻔히 알면서도 자기 몸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는 사연이 그저 안타깝다.

***이하 (  )쪽 내용은 원문 필사한 것임
(76)나에게 펜대를 쥘 만한 힘만 있다면 죽는다는 것이 이토록 편하고 유쾌한 것인지 적어놓고 싶다.--영국의사 헌터의 임종 때 한 말
(93)담배 속에는 니코틴을 비롯해서 자그마치 260여 종에 달하는 화학성분이 들어있다. 벤조피렌 등 발암 물질도 10여종이나 된다. 한 개비 속의 니코틴 함유량은 약 20 mg , 태웠을 때 1mg정도가 흡수된다. 치사량이 50mg이니까 자살하려면 앉은 자리에서 담배 50개비만 피우면 된다.
의사 이장규는 <   >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는 담배의 지배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수필이 재미있는 이유는 주로 '몸'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것을 정신과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104)입에서 항문에 이르는 약 8미터의 위장관은 중간에 있는 괄약근으로 된 서너 개의 문을 완전 개방한다면 바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통기 파이프가 된다.
(105)동물에서 가장 큰 위를 가진 것은 긴수염고래로 그 크기는 자그마치 2.5미터×1.0미터, 용량은 900리터로 한번에 1톤 이상의 먹이를 넣을 수 있다.
육지동물로서는 코끼리가 가장 위대해서 길이가 약 1미터에 달하고 주로 초식을 하는 관계로 그 구조는 사람의 것과 비슷하다. 사람 위의 용량은 남자가 1.4리터, 여자가 1.27리터다.
(117)프랑스병:1495 나폴리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패배, 남은 건 매독, 코가 떨어져나가는 병에 유럽은 공포에 떨었다.
(선생의 화려한 경력으로 미루어 재력있는 집안의 아들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바이올린은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쫓겨가면서 버리고 간 물건을 헐값에 사들인 거고
학부시절 통역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또 신혼생활은 어떠했는가?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 살면서 비가 오면 우산을 받고 밥을 지었다지 않는가?
가난을 체험하고 산 나는 그 누구보다 궁핍한 생활을 잘 알기 때문에 선생이 더욱 존경스럽다.)
(159)사랑의 매질: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練達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브리서 12장 11절
(165)넬슨의 코켓트 엠마:천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다시 말하면 노력의 소산.
'코켓트'는 웃음, 애교, 아양 등 겉은 주고 속은 주지 않는 것이 그 특징.(사전에도 없는 단어)
(225)맥주 마시는 남부독일 사람들이 보다 소박하고 개방적인 데 반하여, 소주 마시는 북부독일 사람들이 보다 세침데기이고 내성적이며, 포도주 마시는 중부독일 사람들이 보다 점잖고 공리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독일도 지역감정이 생각보다 큰가 보다)
(228)위와 장의 역할:술은 약 20%가 위에서 흡수되지만 물은 그 대부분이 장에서 흡수되므로 술 한 되는 거뜬히 마실 수 있지만 물 한 되(1.8리터) 마신다는 것은 여간한 고통이 아닌 것이다. 마신 물이 위에서 흡수되지 않고 마신 만큼 위에서 고이기 때문이다.(물고문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232)평균수명을 70세로 친다면 50대의 정년 퇴직자들은 15년 내지 20년을 본의 아니게 놀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이 책은 1986년 3월에 초판된 것으로 저자가 50대에 쓴 책인데, 불과 40년 전에만 해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을 70으로 내다보았다니 고령인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것인가?)
(233)본시 현대문명의 한 병폐는 젊은이를 너무 치켜세우고 노인을 업신여기는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사람 엔진은 아껴 쓰면 70년을 무난히 넘길 수 있다. 재수만 좋다면 120년 동안도 가동시킬 수 있다.
노인들의 적혈구는 젊은이들의 그것과 같이 어김없이 120일 동안 산다.--
50대 정년 퇴직자들은 일자리를 원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 일하고 싶어한다.
(253)농담의 富는 듣는 자의 귀에 있는 것이지, 지껄이는 자의 혀에 있는 것이 아니다.--세익스피어
(254)흐루시초프가 동구 순방차 기차편으로 모스크바를 떠났다. 어느 정거장에 도착하자 무료했던 그는 팔을 차창 밖으로 내밀었다. 당장 다가와 키스를 하는 자가 있었다.
"아, 체코에 왔구나."
다음 차에 정차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침을 뱉었다.
"아, 폴란드에 왔구나."
다음 정거장에서는 다짜고짜 달겨든 자가 팔목시계를 낚아채고 달아났다.
"아, 드디어 모스크바에 왔구나."
(254)유머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선의와 따뜻함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재산이다.
자선 사업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에고이스트는 결코 유머리스트가 될 수 없다. 따뜻한 마음, 그것이 바로 유머의 원천.
웃으며 살자. 우리는 지금 각박하고 메마른 속에서 살고 있다.억지로라도 웃으며 살아가자.
(255)세모에 어머니가 사다준 군밤 한 봉지--그때는 그토록 손쉽게 행복해질 수 있었고 그토록 그 행복은 손쉽게 바닥이 날 수 있었다.

(요즈음 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문득문득 떠올려 본다.

칠십평생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 수도 없었을 텐데--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행복한 건가?

감사를 모르면 행복도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