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위도 엔간히 물러가고 좀선선해진 것 같으니 우리 입추날 한번 만납시다."
전화선을 통해 짱짱한 목소리가 전해진다. 지난 주 통화내용이다.
오늘이 입추날.
대방동삼거리역까지는 한 시간 거리-- 1시간 30분 전에 집을 나섰다.
순간 양산을 쓸까 망서릴 정도로 아침햇살이 뜨겁다.
약속 장소인 음식점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저만치 가게 앞에 삼자언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울 엄마 모습이다.
울엄마도 나랑 약속을 잡으면 항시 먼저 나와 저렇게 기다리셨는데~
내가 다가가니 일어서는데 허리를 다 펴지 못하고 한 손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3년 전 무릎 수술을 하고 이제는 걸어다닐만 하다고 해서 11자 다리로 똑바로 걷는 모습을 그리며 왔는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재래시장 골목 안 유명 중화반점으로 들어갔다.
전에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손님대접을 못했다며 그때 내가
"이 집 탕수육이 너무 맛있다"며 먹던 기억이 떠올라 한번 더 사주어야지 하고 별렀단다.
탕수육을 먹으면서 삼자언니는 예의 무뚝뚝한 말투로 툭툭 한마디씩 던진다.
--인생이 별거 아냐.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믄 돼~
--죽는 그 순간까지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야 돼, 죽으면 끝이야.
--고민거리 있음 끌어안지 말고 툭 던져버려, 그리구 허허 웃어.
"언니 철학자 다 됐어. 세네카가 앉아계신 줄 알았네."
삼자언니와 나는 50년지기 직장 동료다. 나보다 일곱 살 많으니 큰언니뻘이다. 나의 처녀시절부터 결혼할 때, 아이 둘 낳고 내가 큰병에 걸려 죽을둥살둥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내 역사의 산 증인이다.
신혼 초, 맨손으로 출발해서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 기꺼이 돈을 빌려주곤해서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며 인연을 쌓았다.
키는 큰 편이 아니지만 풍채가 좋고 단단하고 다부진 모습이 내 어머니와 비슷해서 내가 삼자언니를 좋아하게 됐나보다.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저으기 놀랐다.
그동안 내가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었던 삼자언니는 그 인상 때문인지,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옆에서 보아선지, 좀 거친 환경을 헤쳐 나오며 억척스럽게 돈도 모으고 부를 일군 줄 알았다.
그런데 당신은, 엄마가 평생 치닥거리를 다 해줘서, 음식하나 제대로 못 만들고 또 자상하고 돈 잘 버는 남편 덕에 일하는 사람 두고 지금까지 편히 살았단다.
알고 지낸 세월이 길면 뭐하나? 이렇게 삼자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는데--
주변을 돌아본다.
소위 친하다는 사람이 수십 명도 더 되는데 난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 색깔, 속마음--허기사, 친구나 지인 얘기 해서 뭐하나?
한지붕 아래에서 사십 년 넘도록 산 남편에 대해서도 이제껏 몰랐던 사실이 발견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걸---
하, 그러구 보니 삼자언니가 올해 팔순이네~
올해가 가기 전에 집으로 모셔 케익 한 번 자르게 해 드려야지.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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