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초가을 아침
아들네 가족 셋은 회사로, 유치원으로 일찌감치 집을 나서고 네 살 꼬맹이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박완서의 <환각의 나비>를 읽다가 문득 눈을 들어 거실 창밖을 본다.
소리없이 비내리는 정원에는 고요한 평화가 감돈다.
20여 년 정든 뜰이 다정하게 미소짓는 듯하다.
60평 남짓한 뜰에, 어느 구석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꽃이 있는지 눈감고도 안다.
이제 고만 정리하고 아파트로 가자고 채근하는 영감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 여기 오래오래 살다가 죽을 거야" 라고 말한다.
이 집을 처음 구경하러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집이 언덕배기에 있고 주변에 널찍한 집들이 많아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문득 여기가 종로 한복판 맞어 하며
의아해할 정도로 동네가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지는 않았다. 집집마다 나무가 많아서인지 여기저기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작은아들왈,
"이런 집에 살면 라면만 먹어도 배부르겠다."
집을 사려면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퇴직하면 목돈이 나올 걸 염두에 두고 일을 저질렀다.
여기 살면서 아들 둘 장가보내느라 그때 진 빚을 아직 못 갚고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정윈의 사계절을 바라보고 즐기는 댓가라고 생각하니 은행이자 부담은 가벼웠다.
내일을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산다.
상황이 바뀌면 그에 적응하겠지만 나의 소망은 앞으로도 계속 저 뜰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것이다(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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