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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배

맑은 바람 2022. 9. 27. 20:11

김성우 지음/삶과꿈/352쪽/초판 1쇄 1999.5/재판1쇄 2002.10/읽은 때 2022.9.14~9.27

나는 돌아가리라.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출항의 항로를 따라 귀향하리라.
젊은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
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명보트에 구조되어
남몰래 닿더라도 귀향하리라
어릴 때 황홀하게 바라보던
만선의 귀선.
색색의 깃발을 날리며
꽹과리를 두들겨대던 그 칭칭이 소리 없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럼 싣고 돌아가리라.
(가까이 지내는 이가 통영 여행 중에 여기저기 섬 여행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욕지도도 가 봤느냐고 물었다. 난 그곳에 김성우의 자취를 찾아 오래 전(2006.8)에 간 적이 있다.항구 앞에 세운 기념관 철문엔 자물쇠가 채워지고 건물 주변은 어수선해서 지어놓기만 하고 돌보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설레던 내 마음도 차갑게 식었다.)
김성우(1934~ )통영 욕지도 출생/서울대 정치학과/1956년 한국일보 입사, 파리특파원, 편집국장, 주필,논설고문 등을 역임하며  40여 년 동안 언론인으로 살아옴/최초의 <명예시인>이자 유일한 <명예배우>/ 삼성언론상,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 받음

--이 책은 작가의 역사이자 고향의역사, 만인의 역사다.--
(시인이 쓴 자서전은 책장을 펼치자마자 시가 쏟아진다)
(15-16)세상 한가운데에 있는 섬은 출발의 始點이다.사방이 다 방향이다. 모든 방면이 나의 방면이다. 어디에도 길이 있다. 바다는無門의 大道다. 스스로 꼼짝 못하는 섬은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새벽마다 出帆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바다에 갇힌 것이 아니다. 바다를 향해 나의 모든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나는 囚人이 아니라 자유인이다. 섬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선창가의 선박들처럼 줄줄이 매여 있다.밧줄을 풀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대해 복판에 놓인 이 너무 큰 자유,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자유에 나는 이따금 큰배를 탄 듯 멀미를 느끼곤 했다.
섬은 꿈과 그리움의 母港이다.
어릴적 섬의 산마루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던 때 만한 설레임을 나는 그 이후 평생 가져본 적이 없다.수평선 너머 미지를 향해 발끝을 세우던 때보다 더 높은 발돋움을 그후 평생 해 본 적이 없다. 기선의 마스트가 가물가물 사라지는 그 너머에 꿈이 있었고 그리움이 있었다.수평선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다.어느 자를 대고 그은 선보다 더 곧고 어느 줄을 늘인 것보다 더 긴 직선, 튕기면 금방 소리가 날 것 같던 내 어린 美學의 수평선은 아무리 손을 뻗쳐도 절대로 닿지 않으면서 나를 손짓으로 끌었다.
(40여 년간 詩心을 안고 갈고닦은 筆力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김성우작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7)섬을 떠난다는 것은 우주선이 지구의 인력권을 벗어날 때의 탈출 속도와도 같은 큰 힘의 작용이었다. 사실 섬 바깥에 처음 나섰을 때의 나의 걸음걸이는 무중력 상태의 遊泳 같았다. 디딜 바닥이 없었고 아무것도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 늘 허공이었다.그럴 때마다 떠나온 섬을 생각했다.
섬에서 보던 그 바다의 무수한 표정과 무수한 목소리들. 수평선에 침몰하는 장엄한 海日, 물새들의 노래. 바다에 내리는 비.산발한 해초들의 水中舞.어부들의 漁謠. 해녀의 휘파람 소리.아낙네들이 조개를 캐는 물빠진 갯벌의 오후. 밤바다의 漁火들. 만선의 귀항.여객선의 고동소리.통통선들의 합주.어판장에서 무더기로 파닥이는 생선들의 시퍼런 眼球들.낚시에 걸린 술밍이의 무지개색---
**술밍이:
.(23)내 인생의 첫집은 마을 한복판의 오순도순한 이웃집의 하나가 아니라 대좌 위에 높직이 얹힌 무슨 기념물 같은 집이다. 가장 가쪽에, 가장 높은 쪽에 따로 떨어진 그 隔絶은 섬 속의 섬이다. 그 이단과 孤節은 내 인생의 이념이 되었다.
평생 동안 나는 남과 동화하지 못했다. 나의 일생은 異化의 역사였다.그 까닭을 이 출발점에서 발견한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어느 정도의 부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행간에 숨어 있는 고독이 문득문득 보였다.쓸쓸했다.)
(27)기억은 묻힐 뿐 썩지 않는다.
유년은 발육이 멈춰진 비정상아처럼 조금도 자라지 않은 채 거기 있었다.
연화도의 옛집 앞 선창에 선다.
(31)소년은 떠났다.이웃의 큰 섬인 욕지도로 전학을 하기 위해 연화도의 선창을 출발했다. 아직 부화되지 않은 꿈이 싱싱한 어란처럼 붉은 채 이 선창에서 출항한 것은 결국 시옹성을 찾아나선 것이 아니었을까. 이 섬의 선창은 내 인생의 스타트 라인이었고 시용성은그 출발의 목적이었다.
(34-40)아버지: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다. 누가 자기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던가. 하지만 누가 나만큼 아버지의 아들임을 소리 높이 외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모른다. 세상에 자랑스러운 아버지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이 또한 나는 모른다.
---나의 탄생은 나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가진 것만으로도 그 목적이 충분하고 나의 평생은 나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만난 것으로도 그 의미가 넉넉하다. 우리 아버지를 만났으면 세상사람을 다 만난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의 세계였다.
---아버지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바이올린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의 바이올린은 물론 그 섬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악기였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은 순전한 독습이었다.
나는 신기했다. 그 바이올린의 신기함이 곧 내가 느낀 아버지의 첫인상이다.그 이후로 아버지는 일생동안 내내 내게 그렇게 신기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내 첫 학교의 스승이던 아버지는 그 이래 내 평생의 스승이었고 평생을 통틀어 스승다운 스승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직업은 이 선생님이 마지막이다. 30세 전후이던 그때 이후로는 무직의 일생이었다.
어떤 직업도 아버지의 그릇에 담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아버지는 평생 빈 그룻이었다. 무직의 아버지 밑에 우리 식구의 밥그릇도 노상 비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곁에 있으므로 항상 배불렀다.
---아버지는 全人이었다. 일생 동안그 全長을 다 펴보지도 못했다.길이가 얼마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설령 그 길이를 다 폈더라도 그것을 잴 자가 없었을 것이다.
못 갖춘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달변이었고 달필이었다. 구변은 懸河였고 글씨는 典範이었다. 기골이 크고 용모가 준수했다. 신언서판이 이렇게 완비된 것은 조물주의 실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돈을 모아본 적이없다. 생기면 생기는 대로 신나게 썼고 멋지게 썼다.아무 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가진 것은 먼지처럼 털어버렸다.--'무소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게 남긴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집 한 칸도 땅 한조각도 돈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65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그 어리석음을 묘석에 비명으로 새겼다(아버지의 號가 一愚)
'세상에 가장 큰 재주를 가지고 나오셨다 도로 가져가신 우리 아버지'
(작가의 잣대는 세간의 기준과 달랐다.아버지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부럽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자식의 생각을 읽었을까?)
(41-47)어머니:
아버지가 비조형적이고 격정적이고 도취적이어서 디오니소스적이었다면 어머니는 靜과 절제와 조화로 아폴론적이었다.
아버지는 바다였고 어머니는 산이었다. 나는 산이 낳았고 바다가 키웠다.아버지는 바닷가에서도 바다 한복판의 섬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산중에서도 아주 외진 산골에서 자랐다.
--어머니의 고향은 집이라야 10여호밖에 안 되는 심심산골의 후미진 마을이었다.농사라고는 콩밭이 거의 모두였고 일년 내내 콩죽만 먹다시피하여 '죽곡'이라 불렀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동학란 때 피난을 와서 이 산간 벽촌에 숨었다.어머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10세까지 자라다가 읍으로 나왔다.--어머니는 40세 때 섬에서 육지의 고성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섬생활 23년을 회상할 적마다 '"평생그렇게 고생한 시절이 없다"고 진저리를 냈다.
--어머니는 바다에 정이 들지 않았다.바다는 사나웠고 변덕쟁이였다.여행을 다니면서 조용한 산을 바라보면 반가웠다.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여간 정겹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산사람이었다.평생 바다와 화해하지 못했다.내가 섬을 나의 고향이라고 자랑할 적마다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머니는 참으로 산같은 사람이었다. 산같이 무거웠다.그리고 꼿꼿했다. 정직했다. 거짓말을 못했다.잘 참았다.쉽사리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자립심. 남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싫었다./자존심.남에게 쌔곤소리(혀 아픈 소리)나 고개 숙이는 짓을 못했다.그래서 잘사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잘못 보였다./독립주의자였다. 스스로 남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고 남의 일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절제주의자였다.한가지 일에 빠지거나 미칠 줄 몰랐다./눈이 정확했다.사람을 잘 봤다.이모저모 따지고 보면 꼭 마음에 드는 사람이 드물었다.그래서 절친한 친구가 없었다./무정했다. 자식들에게도 엎어지는 법이 없었다./어머니는 학식이 없었지만 커다란 양식이 있었다.학문이 양식을 쌓기 위한 것이라지만 아주 큰 양식은 학문 이전의 것이다.
나의 모든 도덕률은 어떤 법전보다도 어머니의 양식이 기준이 되어 왔다.어머니는 곧 나의 규범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논어'였고 나의'명심보감'이었다.
'꼿꼿하시고 잘 참으시고 늘 정직을 가르쳐 주신 우리 어머니' 이것이 아버지의 묘비명과 나란한 어머니의 묘비명이었다.
내게 조그만 재능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내게 조그만 미덕이라도 있다먼 그것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의 재능은 바다가 낳은 것이고 나의 성격은 산이 낳은 것이다. 바다의 격정이 나의 재능을 이루었고 산의 고요가 내 성격을 만들었다.
(요즘사람들 중에 자기 부모를 이렇게 세세히 살피고 분석할 수 있 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선한 심성과 신뢰, 깊은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리라)
(49)사람들은 바깥 세상의 미지를 향해 고향을 떠난다.고향에는 아무것도 없고 고향 바깥에는 모든 것이 있는 줄 안다. 이들에게 고향은 텅빈 空洞이요 타향은 萬有의 장터다.
(50-53)즐풍목우(櫛風沐雨), 바람으로 빗질하고 빗물에 목욕하며 타관의 낯선 거리를 방황하는 弱喪의 무리들.이들이 과연 고향 밖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51-53)나의 땅

고향을 떠난 이후 나는 고향에 말뚝을 박을 나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했다. 마침내 30년 만에 내가 자란 마을의 산을 사들였다.그때는 미처 이 산에 짝밤나무(모밀잣밤나무:천연기념물343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그날 하루 나는 천지창조 후의 조물주처럼 안식했다.그 다음날로 그 감격에 떠밀려 고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가출한 나를 찾은 것이다. 내 놀던 옛동산이 내 것이 된 것은 내게는 온 고향땅이 내것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고향을 몽땅 가졌다. 고향을 가졌으면 그보다 더 귀한 소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다. '부자가 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고향을 찾아갔다.
이제는 고향 밖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천연기념물의 모밀잣밤나무들이 나의 정원수가 되었다.내고향의 내 산에 모밀잣밤나무가 자라고 있는 동안은 주인공이 영원히 늙지 않는 나의 동화가 천연기념물처럼 언제까지나 거기 남아 있을 것이다.
(56)연화리에서 초등학교 입학:
교실 두 칸인 학교/선생님 둘, 학생 40명쯤/학교 둘레는 동백나무가 울창했고 철 되면 동백꽃이 울고 싶도록 붉었다. 뒷산을 타고 내려오는 솔바람에 학교 종은 하루 종일 댕그렁거렸다. 교실의 창가에 앉으면 창틀 속에 액자의 그림처럼 끼이는 바다, 앞섬 어깨 너머로 몇 점 섬이 뜬 바다가 노상 거기 있었다. 실로 이 액자 속에 든 바다의 靑紙는 백지 대신 나의 공책이었다. 공부시간의 어린 상념들을 그 위에다 마구 낙서했다.
(65)첫사랑 만난 이야기 (40년 만에 마음 속 소녀를 만났다)
다방에서 마주앉았다. 옛소녀는 인사 대신 씩 웃기만 했다. 아, 그러나 나는 재주없는 화가였던가. 내가 그려온 그림의 소녀가 아니었다.어릴 때 모습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나 길에서 지나치면 전혀 못 알아볼 얼굴이었다. 서투른 글씨의 편지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 곱게곱게만 채색되어 온 소녀는 순전한 農婦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훗날 첫사랑을 만나서 크게 후회들 하면서 꼭 한번 만나고야마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70)잃어버린 동화:
책은 저마다 읽어야 할 계절이 있다.책이 철을 잃으면 철 지난 과일처럼 제맛을 잃는다. 책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섭취되는 양분이 다르다. 그 나이에 알맞은 책이 그 나이의 정신을 기른다. 동화는 어릴 때 읽어야 동화다. 동화는 어린이의 꿈과 상상력을 키우는 滋養이다. 산타클로스를 잃어버린 어른에게 동화는 無味하다.
(도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도 중학교 도서관에서 '세계명작'을 만나기 전까지는 교과서 이외의 책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50년대 국민학교에 도서관이 있을 턱이 없고, 어머니는 교과서 이외의 것은 불필요하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만화책 한 권 사준 적이 없다. 하기사 그 옛날에 만화책 사 주는 부모가 몇이나 있었을라구. 며칠 전 독서모임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門'이라는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책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섭취되는 양분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20대가 만난 소세키와 70대가 만난 소세키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71)노년에 동화를 읽듯 연대를 거꾸로하여 읽는 책은 책을 뒤집어들고 읽는 것과 같다.
(72)해방이 되자 섬에 살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귀환을 했다.우리집 뒷집에 일본인 학교의 교사가 살다가 떠나면서 내게 두꺼운 세계지도책 한 권을 작별의 선물로 주었다.이 지도책이 바로 나의 동화책이었고 나의 그림책이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동화가 있었다. 낯선 나라들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였다. 그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외국 도시와 항구의 이름들은 내 동화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도의 녹색 평야와 흙빛 산맥들, 푸른 대해와 빨간 줄들의 항로들, 저마다 빛깔이 다른 나라들, 그것은 어떤 꽃밭보다도 아름다웠다.
실로 나의 일생은 이 세계지도책 한 권에 이끌려 왔다. 이 책은 내 인생의 예인선이었다. 그것은 나의 성서였고 그 속에 모든 길이 있었다.
(은유와 함축으로 이어지는 시적인 문장이 읽는 즐거움을 준다. 조금은 대하기 조심스럽지만 호감을 느끼고 있는 벗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느낌.)
(90)선생님에 대한 기억
누구나 고개 숙여야 할 이 거룩한 낱말 앞에 나는 국궁할 수가 없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중학교 입학한 첫날 첫시간, 아버지가 만들어 준 모자를 들켜 무안해진 나는 혀를 날름거렸고 그 때문에 담임선생한테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다.)
(93)중학교 첫날의 수난은 나의 정신적 外傷으로 남아 평생 치유되지 않았다.죄명을 알 수 없는 無顔의 赤面은 학년 말의 대역전극(학년 전체 1등으로 우등생 대표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음)으로도 복수가 된 것이 아니었다.그날 이후 나는 내 이름이 불려지면 더럭 겁이 났다.겁많은 내 이름을 감추듯이 데리고 일생을 살아왔다.(교직에 몸 담았던 사람들 대부분 알게 모르게 아이들한테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었으리라. 훗날 옛일을 돌아보며 자신이 모자라고 덕이 없었음을 뉘우치면 다행인데, 문제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르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끝내 죄책감을 못 느끼는 선생님들이 많다는 거다.)
(95)학교는 인생의 준비과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생은 학교의 문을 나서는 날부터 시작된다는 통념은 오해다.학교생활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교실이야말로 인생의 경기장이다. 학교자체가 한 사회다. 공부 자체가 생활이다.
하루는 오전이 길고 오후가 짧다.밤만해도 초저녁이 더디고 자정이 넘으면 금방 지나간다. 시계가 재는 시간의 길이는 같아도 체감상의 길이는 다르다. 사람의 한평생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의 세월은 漫步하고 노년으로 갈수록 驅步한다. 어떤 학자의 연구로는 인생의 정오는 25세라고 한다.
(작가는 학창시절 우등생이었던 걸 무척 자랑스러워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일생 중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학창시절'이라고 말한다.공감을 얻기 어려운 말이다)
(98)가난의 연대기
(때거리가 없어 아침부터 빨래터로 나가 빨래방망이만 두드리던 어머니/중학교 때는 동네 제일 부잣집에서 학비를 조달 받고/고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빚을 얻어다 입학금을 대주고/대학 3학년 때 신문사에 취직, 언론의 길로 들어선다.)
(102)가난만한 설움이 없다지만, 한창 자라던 때 제대로 채워져 보지 못한 나의 배 안이었다. 아무것도 소화시킬 것이 없었던 내 위장의 空日은 春日처럼 길었다.
(106-107)피난시절의 부산:
부산은 전쟁의 쓰레기장이었다.
부산은 곧 전국이었고 한 도시국가였다. 온 국력이 압축공기처럼 팽팽히 집결해 있었다. 국권과 민생의 총집합이었다. 상하도 빈부도 몽땅 국방색으로 통일된 채였다. 모든 계급은 군대 계급으로 바뀌었다. 거기 赤身의 평등이 있었고 시끄러운 평화가 있었다.
부산은 참으로 부산했다. 나는 그후로 그때의 부산만큼 생기 있는 도시를 본 적이 없다. 온나라의 生者가 한자리에 다 모인 것 같았다.있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없어야 할 것도 다 있는 만화경의 도시였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시대였으면서도 소음의 데시벨이 그렇게 높은 도시도 없었다.
전선에 戰場이 있었고 후방에 市場이 있었다. 전장에 죽음이 있었고 시장에 삶이 있었다. 시장에는 전쟁의 양식과 전장의 토사물이 자꾸만 산적되어 갔다.
당시의 국제시장. 그 궁핍의 시대에도 거기는 풍요로웠다. 그것은 존망에 처한 나라의 위안이었다. 가득 쌓인 물건만큼이나 골목골목을 가득 채운 인파들, 그 생명감은 전시 국민의 의기가 아니었던가. 사실 국제시장 안에 온 도시가 있었고 온 도시가 국제시장이었다.
나의 6ㆍ25는 전장의 동란이 아니라 이런 시장의 동란이었던 것이다.
부산은 슈샤인 보이와 소매치기와 걸인의 거리였다. 추잉껌과 양담배와 깡통의 천지였다. 군복과 군용차들이 길바닥을 메웠다. 판잣집과 천막촌이 도시의 지붕을 덮었다. 국방색 사아지의 미군 군복을 검정색으로 염색해 입은 신사들이 피난민 사이를 누볐다. 질서도 가치도 문화도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훤소(喧騷)와 잡담, 詐僞와 無道, 아귀다툼과 아비규환이 당시부산의 大氣였다. *훤소:왁자하게 마구 떠들어 소란함
(피난시절의 부산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글이 있을까?)
(113-116)머나먼 서울, 드디어 입성:
--실로 어릴 적 이 섬에서의 서울은 먼 별나라였다.--서울을 다녀온 사람은 면장보다 높은 사람. 서울을 다녀온 사람은 선생님보다도 아는 것이 많을 사람. 그래서 서울을 다녀오면 그 아들마저도 그날부터는 마을의 골목대장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서울행은 멀었다. 그 곧은 길로 바로 못 가고 수많은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작은 섬에서 큰 섬으로 옮긴 것은 越海의 연습이었고 중학교 입학과 함께 소도시에 상륙한 것은 하나의 비상이었다. 고등학교를 대도시로 진학하면서 서울은 점점 근접해졌다.--그러는 사이 우리집은 섬에서 육지의 소읍으로 영영 이사를 나왔다. 섬과의 영원한 결별이었다. 그때 내 청춘의 향수는 물을 떠난 고기가 퍼득이듯 몸부림쳤다.
6ㆍ25전쟁이 휴전되던 해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수도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대학도 귀경했다.피난보따리들이 도로 서울로 올라오는 임시수도 부산의 어지러운 驛頭. 나는 그 보따리의 꼴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내가 기차를 타 본 것은 이때가 난생 처음이다.
(119-124)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는 당시 모든 젊은이들에게 偶像의 학과였다. 커트라인은 높직이 혼자 독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대학의 전 학과를 통틀어 합격선이 제일 높았다.
--광복된 조국은 황량했다. 새나라를 세울 인재가 절실했다. 시대는 대학에 희망을 걸었고 기대가 컸다.이럴 때 정치학은 만인의 母學이었다. 정치학과는 건국을 위한 創發의 학과였고 부흥을 위한 구원의 학과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는 나라의 인재를 가려내는 選鑛所였고 인재 중의 인재를 길러내는 제련소였다.
--폐허를 딛고 나라가 일어서는 고난의 연대 속에서도 정치학과의 대학시절은 내게 신록 같은 4년이었다. 그렇게 푸르르고 그렇게 싱싱하고 그렇게 찬연했다. 우리는 才氣와 覇氣와 그리고 조금의 客氣를 가지고 캠퍼스에 섰다. 때로는 열변하고 때로는 沈思하면서 우국하고 학문했다. 나라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脚光은 우리 강의실에 조명되어 있었다.
--나의 대학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했던 시기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祉福이었고 광휘였고 은혜였다.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강의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문리대 교정의 명물이던 마로니에의 꽃향기는 지금도 전신에 배어 있다.
(129)'정치는 詩心으로, 문학은 참여하자'--이것이 <정문회>의 모토였다. 정치로 문학하고 문학으로 정치하자는 말이다. 특히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정치에는 시가 없다. 문학과는 인연이 멀어 보이는 정치가라 하더라도 그가 하나의 위대한 정신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속에 시가 흐르고 있어야 한다. 문학이 인간을 구제하고 그 인간을 통해 사회를 구제하는 것이라면 정치는 문학과 악수해야 한다.인간성의 파트롱이 문학이듯이 정치 또한 궁극적으로 수호해야 하는 것은 인간성이다.작가가 시대의 자기 완성을 도우는 힘이라면 정치가에게는 작가 정신이 불가결하다. 세계는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고 문학이 그 길잡이라면 정치는 문학에 길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이런 悟道가 정문회의 開宗정신이었다.
(134-)나의 푸른 젊음은 軟綠이 녹음으로 우거지도록 남의 집에서 남의 밥을 먹으며 남의 식구와 함께 익었다. 家外의 청춘이었고 문밖의 인생이었다.
전 재산이 든 허름한 트렁크 하나를 들고 새로 하숙을 옮겼을 때 좁은 방에 누워서 쳐다보는 천장 벽지의 낯선 무늬. 그것은 감방이었다. 방 하나가 온 집이었고 나의 우주였다. 그럴 때마다 밤새도록 울어대던 문풍지 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하숙집에 불어오는 바람은 노상 외풍이었다.집이라지만 하숙집은 기실 야외였고 하숙생은 집안에 있으면서도 집없는 아이였다.그런冷氣 속에서 나는 야채처럼 자랐다.
하숙집은 남의 밥이다.
꿀벌이 여왕벌이 되느냐 일벌이 되느냐의 차이는 유충시대의 먹이에 달렸다. 밥은 사람의 뼈를 만들고 기질을 만들고 사상을 만든다. 생물학에서 유생의 특징이 성체가 될 때까지 간직되는 것을 네오테니라고 한다. 식성은 일종의 네오테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길들여준 입맛은 평생 간다. 페이터의 아름다운 산문으로 적었듯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옛 음식을 먹어보리라는 기대가 객지의 나그네에게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된다. 그 어머니 밥의 공복을 남의 밥이 채웠고 결국 남이 내 뼈와 내 기질과 내 사상을 만들었다. 하숙밥은 아무리 뜨거워도 밥상이 서늘하다.식은 밥과도 같은 그 또 하나의 냉기가 나의끼니였다.
(하숙생에 관련된 기억--피난지에서 돌아온(1953년?) 내 유년의 집은 당시 서울 법대 근처의 초가집이었다. 마당은 넓고 건넌방에 해당하는 단칸방은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살고, 행랑채에 해당하는 대문쪽 방들에는 하숙생들이 달박달박 살고 있었다. 그때 딱 하나 떠오르는 기억은 주인이 집을 비운 때에 하숙생들은 안방을 점거하고 마루문 창호지 구멍으로 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소쿠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소쿠리 아래엔 참새를 유인하는 쌀 한줌이 놓여 있었다. 새 사냥이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나도 숨을 꼴깍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억이 난다.)
(136)마지막 하숙집:
하숙집은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었다. 농군이던 주인 내외는 참 선량했다.밤늦게 들어오거나 새벽녘에 야근을(한국일보 근무 당시) 하고 오거나 대문을 한 번 두드리면 금방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고 아무 말 하지 않으면 그 한밤중에도 반드시 밥상을 차려왔다. 내 寒食 시대의 더운 밥이었다. 다들 떠난 뒤에도 나 혼자 오래 유숙하고 있었다.
이 연희동 127번지는 지금도 번지를 기억할 만큼 내 지나간 '현주소'의 하나로 남아 있다. 표랑하던 내 정신이 여기서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훤소를 벗어난 전원에서의 여러 해는 타향감을 잊게 해 주었다. 서울은 만인의 타향인 것. 그 타향 속에 고향이 있었다. 도심으로 나가는 출근은 매일의 출항이었고 퇴근은 매일의 귀향이었다.
(143)신문배달소년:
신문기자가 내 평생의 직업이 된 것은 이 첫 직업의 응원 때문일 것이다.
평생의 천직은 우연한 첫 직업 속에 점지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신문 배달 때 신문기자의 幼蟲이 자라고 있었다. 훗날 신문기자가 되고 나서 깨달은 일이지만 사실 신문은 직접 배달을 해 보지 않고는 그 의미도 가치도 완전히 모른다. 나의 조기교육은 적중했다.
신문은 향기가 있다. 여객선에서 내려진 신문뭉치를 받아 들 때마다 물씬하던 잉크 냄새. 갯바람의 비린내만 맡던 코에는 도회의 향기요 문명의 향기이던 그 신문 냄새는 그때 익숙해진 이후 지금은 내 체취가 되었다.
--새로 창간한 <한국일보>가 우리나라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공채기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대학 3학년을 마쳤을 때 나는 재학생으로 한국일보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정식 신문기자가 되었다. 이것이 내 평생의 직업이 시작된 것이다.
--신문은 나로서는 첫 직업 이후 정해진 외길이었다. 그리고 그 이래 나의 언론 인생도 외길이었다.
(156-159)국토건설단:
(혁명정부가 나이든 병역 기피자에게 군대 대신 의무 노역 1년을 이행하면 제대증을 주었던 제도.)
강원도 정선군 남면 유평리.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후미진 산골이니 길 같은 길이 없던 당시로서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내가 소속된 약 400명의 제 25 건설대는 예미에서 정선까지의 정선선 철도 부설공사를 맡아 있었다.
囚人의 번호와 같은 단번을 달고 건설단원들은 갤리선의 노 젓듯 노역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계 대신 기계처럼 움직였다. 사람이 기계가 되는 것처럼 큰 형벌은 없다.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 30이 가까운 노병들은 50분 작업에 10분 휴식인데도 5분 일하고 10분 쉬었다.
복무기간 1년은 우리에게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원한 1년' 같았다. 올림포스 산에서의 죄인은 영원한 1년을 복역해야 한다.
--민가라고는 산모퉁이를 돌아나간 곳에 조그만 마을이 하나. 그리고 산 너머에 외딴 집들이 띄엄띄엄했다. 돌밭에서 나는 것은 주로 강냉이어서 주민들은 이것으로 하모니카 몇 개 불고는 끼니를 때웠고 술도 기름이 둥둥 뜨는 누런 강냉이 막걸리뿐이었다. 한해 내내 가야 쌀톨 구경을 거의 못해 건설대에서 먹다 남은 밥을 갖다 주면 흙벽의 마굿간 같은 방에서 온 식구가 포식을 하곤 했다. 정선선 철도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착공된 것이고 그것은 이 빈곤을 타파하기 위한 경제 건설의 제일보였던 것이다.---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자 소대장 등 기간 요원들의 채찍이 거칠어졌다.--그래도 목표량을 달성하는 날은 거의 없어서 연장 작업을 하느라 별을 이고 작업장에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흙뜨는 삽을 어깨에 메고 밥 뜨는 숟가락을 윗 호주머니에 꽂은 채 나갔다가 저녁에는 긴 파김치의 행렬이 되어 삽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그 소리를 댕그렁거리며 귀대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느날 갑자기 젊은 국사선생님이 사라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병역기피자로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강원도 정선은 고2 때 봉사활동을 갔던 곳이다. 자기 먹을 쌀은 각자 준비하고 신문지를 있는 대로 많이 준비해 가지고 갔다. 나는 도배반에 배정되어 집집마다 다니며 흙벽에 신문지를 발라 주었다. 어찌 작가의 '국토개발단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고된 나날 속에서도 짬짬이 틈을 내어 산속에 원두막을 짓고 '길의집'이라 명명했다. 백일장도 열었다. 얼마나 멋진 일이냐!)
(168)내 집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과거가 여기 살고 있으니 나를 떠나지 마오"
그러자 길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미래이니 나를 따라오시오"--칼릴 지브란
(170)1964년 '주간한국' 창간, 초대 부장/일간지 주간지를 통틀어 최고의 부수를 자랑함(43만5천 부/일간지 기록은 20만 부가 채 안됨)
(175)나는 주간한국 창간 시절의 영광을 自讚과 自惚의 현기증 없이는 회상하지 못한다. 내 독창의 기교가 십분 발휘된 카덴짜의 시대였다.<주간한국>의 개가는 신문기자로서뿐 아니라 그때 막 30대에 들어선 내 인생의 大捷이기도 했다.
(178-181)12만 3백 톤짜리 유조선 시스타호를 타고 서양으로:
空日의 연속이다. 빈 바다 복판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빈 하루들을 보낸다.보이는 것이라고는 똑같은 빛깔의 변함없는 바다뿐이므로 바다의 세월은 배경이 없어 가는 줄을 모른다. 이것이 대양의 시간이다.--배를 타고 있으면 살이 찌겠다 싶었더니 선원들 말은 "철판 위에서는 아무리 잘먹어도 살로 안 간다"고 한다. 발을 땅 위에 디디고 흙냄새를 맡으며 먹는 음식이라야 영양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도 결국은 한낱 초목인 것.
(182-183)마침내 쿠웨이트의 미나알라마디 항에 입항한다. 꼬박 16일 만에 나의 渡洋은 끝났다. 6200마일의 항해였다.내가 디딘 세계의 첫발이 하필이면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였다./나를 해외에 건네다 준 거대한 나룻배 시스타호는 그 4년 뒤 페르시아만 입구의 오만만에서 충돌사고로 침몰했다.
(201-206)파리생활:
나는 파리에서 40회 생일을 맞았다./나는 만 8년 동안 파리의 지붕 밑에서 생활하게 된다./나의 방은 노트르담사원이 있는 시테섬을 마주 바라보는 세느강 강변 2층집이다./신문사의 편집국장 대리이던 나는 성곡언론재단의 지원으로 파리 제2대학의 신문연구소 연수생 으로 왔다./아침 7시에 일어나 우유 한 잔에 바게트1/4토막을 씹어먹고 집을 나서면 아직도 어둡다. 30분을 걸어서 파리 제3대학에 도착할 때쯤 날이 새기 시작한다.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으나 이 거리의 산보가 나는 좋았다. 2시간짜리 수업을 마치고는 무프타르 거리의 노천시장에서 장을 봐다가 집에 와 점심을 끓여먹고 다시 걸어서 파리제2대학으로 향한다. 거기서 알리앙스로 직행했다가 지하철로 저녁 다섯 시 반쯤 돌아오면 어둑어둑하다. 나는 종일 학생이었다. 카르티에 라텡의 학생이고 싶었던 내 젊은 날의 소원을 이렇게나마 풀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남의 유학일지를 살뜰히 베끼는가?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하는 듯하여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학교실의 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나는 왜 프랑스어를 배우는가'를 차례로 설명하게 했다.
나는 "베를렌의 시를 원어로 읊기 위해 배운다"고 대답했다.

가을의 노래--베를렌(1844~1896)프랑스 詩王

가을날
비올롱의 가락
긴 흐느낌
하염없이
내 마음 쓰려라

종소리
가슴 메여
나 창백히
지난날 그리며
눈물 흘리네

쇠잔한
내 신세
모진 바람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낙엽 같아라

(206)말이나 배우러 파리까지 왔느냐. 그러나 세상에 말만큼 난해한 철학이 없다. 그리고 언어를 정복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정복하는 것이다./파리 제2 대학 신문연구소의 1년 과정이 끝나면서 나는 신문사의 파리 주재 특파원으로 발령이나 계속해서 이 도시에 머물게 된다./나는 파리에 체재하는 동안 대학이 가르쳐 주지 않은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된다.실로 파리는 나의 대학원이었다.
(208--)프랑스 정부가 1996년 나에게 국가공로훈장을 주었을 때 그 서훈식에서 나는 '나의 프랑스 체재 8년은 나의 르네상스였다'고 답사했다./방을 얻고부터 맨 먼저 순례에 나선 것이 루브르였다./8개월째에 나는 루브르를 완전히 두 바퀴 돌았다. 루브르는 내 新學의 입문이었고 내 문예부흥의 대문이었다.
(215-216)파리가 내게 준 문화충격은 어릴 때 섬뚜기가 육지의 도회지에 갓나왔을 때 만큼이나 컸다./세계문화의 潮流 위에 배를 띄운 나는 船醉처럼 어지러웠다. 파리 체재 기간은 나의 開明期였다
나는 비로소 문화인으로 개조되고 있었다.어둑한 나의 중세는 밝아오고 있었다.
(216- )파리특파원:
나는 신문사 특파원으로서 파리에 체재하는 동안 집없는 소년처럼 프랑스와 유럽 전역의 길거리를 쏘다녔고 이름 있는 문패 앞에서마다 故友이기라도 한듯이 그 문을 두드렸다.길들은 이슬 맺힌 새벽 풀밭처럼 향기로웠고 인물들은 圓光을 두른 듯이 눈부셨다. 나의 파리특파원 생활은 路行과 對人의 퇴적이었다./파리특파원은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내가 나를 자천한 직책은 파리특파원밖에 없다.
(222)데카르트는 '방법론서설'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디른 세기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길을 가는 것만 여행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름들을 만나는 것도 여행이다. 인생의 길이는 여행의 길이다. 나는 파리특파원의 행운으로 모든 여행을 다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방법론이었다.
(232)한국일보 편집국장의 신조:
신문은 맛도 있고 멋도 있어야 한다. 유익하고 격조 있으면서도 재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신문은 편지다. 그렇게 궁금한 것이라야 하고 반가운 것이라야 한다. 신문은 싱싱한 생선 같아야 하고 풋풋한 새 풀 냄새가 나야 한다.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신문이 아니라 양식을 전달하는 것이 신문이다. 칭찬할 용기를 가진 신문이라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신문이라야 한다. 새로운 뉴스만 특종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도 특종이다. 정확하라.특종이 있는 신문보다는 오보가 없는 신문이 권위지다. 이래야 다른 신문과 다른 신문이 된다. 이것을 나는 역설했다.
(238- )5공 정권 시절의 언론 통제:나의 한국일보 편집국장 재임은 김영삼씨의 단식투쟁으로 시작되어 3김씨의 전면 해금으로 끝난다.
김대중(1924--2009)향년85세
김종필(1926--2018)향년92세
김영삼(1928--2015)향년86세
(240)천관우칼럼/안의섭 만화의 탄압/호외 배달에 책임을 물어 지방담당 업무국장 면직
(246)4월1일자로 편집국장 경질발령이 났다.양김씨의 6단 사진이 실린 지 채 한 달도 못 넘긴 때였다.
(248-253)40년 기자생활의 소감:신문기자가 아니었음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지금도 나는 대안을 모른다.평생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한번도 자기 직업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전혀 요령부리지 않고 지나온 직진의 세월이었다. 이 愚直이 나를 40여 년 동안 근속시킨 동력이다./신문기자는 패스를 가진 사람이다. 통과 못하는 데가 없다. 시내버스도, 극장도 무료, 야간 통행금지도 없는. 이 특권이 나를 신문기자로 붙잡아 둔 매력이 전혀 아니었단 말 못한다./그러나 나를40년 기자이게 한 것은 신문사라는 직장의 청결성이다. 신문의 양심과 함께 신문사의 양심성이 내게 적성이었다./신문기자가 신문에 쓰는 일기는 곧 역사다. 나의 일기는 얼마만큼 洗草되지 않을 實錄일 것인가./불침번의 나날이었다.나의 반생은 야근이었다.내 불면의 밤들의 불빛을 줄줄이 엮으면 은하수가 될 것이다./대관절 나의 어느 구석이 신문기자를 천직이게 했을까. 나는 정직과 정의가 관철되는 직업인이고 싶었다. 자신의 구겨지지 않는 양심으로 세상의 양심을 불밝힐 수 있는 使徒가 신문기자다.신문은 정직과 정의와 양심의 표상이다./신문을 믿지 말라.이것이 신문과 함께 평생을 살아오면서 得道한 나의 誡命이다. 신문 불신이 40년 기자의 매니페스토인 것은 패러독스다./신문은 항상 새 물결이다.신문 제작은 하루하루가 새롭기 때문에 매일이 견습이다.기자는 신문을 언제까지나 견습기자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견습기자다. 신문은 항상 젊다.신문이 늙지 않는 한 기자도 늙지 않는다.
(274-278)'명예시인'이 됨:
1967년 新詩 60년 되던 해, 주간한국 부장이던 김성우 주최로 '시인만세' 행사가 열림/서울시민회관에 2000여 관중이 운집함/처음으로 시낭송가 탄생/1986년 김성우가 '주간한국'사장이 되어 19년만에 '시인만세' 부활/1987년 '시인만세' 때는 세종문화회관 4000석 전석 매진/'11월 1일'을 '시의 날'로 선포/이 공로로 시인단체로부터 명예시인 칭호를 받음/백상기념관에서 시사랑모임 개최/1988년 정지용 시인 해금으로 지용회 발족/박인수 이동원의 '향수'가 작곡됨/명예시인은 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명예시인은 시인보다 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나는 행상처럼 이슬같은 시를 광주리에 담고 시를 외치며 항상 한 걸음 뒤에서 시인을 뒤따라갈 것이다.
(279- )명예배우:
이아고역의 이해랑, 햄릿역의 김동원그들은 진짜연극인이다./나의 기자생활 40년 축하연에서 한국 연극협회는 내게 '명예배우'의 칭호를 주었다.언론계에 있으면서 연극에 애정을 가지고 연극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뜻에서였다.
나는 세계 최초의 명예시인이자 세계 최초의 명예배우다.
(287-301)수국 건국-결혼
한산도 앞바다, 느낌표 같은 두 개의 섬 6000평을 샀다.(화곡동 5평 땅값에 해당함) 그리고 '水國'이라 명명함/그의 딸 이름도 水國이다./문화부로부터 작가촌으로 지정된 수국에서 시인학교가 열렸다.
그러나 꿈의 대가는 비싸다.꿈이 꿈일수록 그 꿈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꿈을 흔들어 깨우는 훼방이 반드시 있다.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꿈을 자랑할 것이 아니다. 꿈은 외롭다.아무도 꿈편이 아니다.꿈은 남의 이해를 초월한다.꿈이 없었으면 나는 한평생 이렇게 구겨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꿈 때문에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총계가 우르르 무너지는 수모와 고초를 당하게 된다. 꿈은 나를 건설했고 그리고 나를 파괴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슴이 서늘해진다.김교수는 알테지.)
나이 만 60세 되던 해 나는 비로소결혼을 했다. 그 결혼식장이 수국섬이었다.이미 8살이 된 수국이가 花童노릇을 했다.
주례를 맡았던 노재봉 전총리는 이날 결혼식을 이렇게 총평했다.
"그림 같은 결혼식이었고, 그것은 김성우 자작ㆍ주연의 드라마였다."
명예배우인 나는 평생에 꼭 한 편만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결혼식이었다.
(302-308)결혼의 辯:
내게는 결혼한 이유의 가짓 수가 늦도록 결혼 안 한 이유의 가짓수 만큼이나 많다./젊은 날의 고집도 욕심도 포기할 나이가 되었다.고집과 욕심이 없어지니 결혼이나 하고 싶어졌다./결혼생활을 할 여생이 과히 길지 않다면 결혼은 해 볼만한 것이다. 결혼이 아무리 지옥이더라도 지옥이 잠시라면 가 볼만한 것이다./나이가 들면 차츰차츰 바보가 되어 간다. 바보가 할 짓이라고는 결혼밖에 더 있겠는가(이쯤되면 김성우라는 인물에 대한 선호도가 갈릴 것이다. 나조차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니--)
나의 결혼은 귀향이다./아무리 핑계가 수천 가지더라도 미혼은 미흡한 것이다.결혼이란 결함을 메우는 일이다./나는 무종교의 神父였다.假衣의 僧服을 벗는다.
(311)새것과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내가 사는 이유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존 키츠)' 이 말은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314)미학의 대가(에티엔 수리오)
에티엔 수리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그는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차례를 매기지 않는다. 단테의 시 한 귀절, 모네의 그림, 岬角에서 바라보는 성난 바다, 푸른하늘 아래 봄꽃 핀 산사나무, 이런 것들은 다같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이 가운데 한 가지만 마음에 채워지면 나는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
美學은, 큰 미학은 작은 이슬방울의 아름다움 속에 전 우주적인 미를 보는 기술의 학임을 나는 배웠다.
(315)먼 것은 아름답다.

별은 그래서 아름답다.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자꾸만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추억보다 아름답다. 꿈이 추억보다 더 멀기 때문이다.
(316)'아름다움으로만이 존재와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니체
사랑없이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애정의 눈길 아닌 눈에는 미가 띄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숙성시켜온 모든 종류의 애정은 미를 붉밝히는 조명이었다. 세상이 아름답자면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나의 눈물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렌즈다.
(336-337)다른 사람과 다른사람: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내려지자 "만약 나를 죽인다면 다시는 나같은 사람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임을 자각한 선각자였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고 싶은 나로서는 내 인생의 版權이 내게 있다.
내 인생은 不許複製다. 하나님은 나를 만든 후 복제를 하지 못하도록 그 鑄型을 부수어 버렸을 것이다. 아무 종교도 없는 나는 바리새인처럼 기도한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는 니체가 "나는 왜 이리도 현명한가"하고 스스로 경탄했듯이 나는 내 자신에게 박수친다.
(346-352)돌아가는 배: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기장 변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 그것이 바다다./나의 바다는 나의 공화국. 그 황량한 廣大가 나의 영토다. 그 풍요한 자유가 나의 주권이다.그 공화국에서 나는 자유의 깃발을 공화국의 국기처럼 나부끼며 자유를 심호흡할 것이다./

섬은 파도의 고향이다.나는 파도였다. 나의 일생은 파도의 일생이었다./아침녘의넓은 바다는 꿈을 키우고 저녁녘의 넓은 바다는 욕심을 지운다. 어린 시절의 내 몽상을 키운 바다는 이제 萬慾을 버린 내 노년의 무엇을 키울 것인가/돌아가 무엇을 할것이냐고 묻는가.그림을 그리리라./

나는 하나의 라스트 신을 상상한다.

한 사나이가 빈 배에 혼자 몸을싣고 노를 저어 섬의 선창을 떠난다.

배는 돛도 없고 발동기도 없고 정처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것도 싣지 않았다.

한바다로 나간 뒤에는 망망대해뿐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배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귀절은 가슴을 뛰게 한다.김성우의 멋진(?) 마지막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런 빈배라도 띄울 선창을 나는 찾아간다.물결은 정지하기 위해 출렁인다.배는 귀향하기 위해 출항한다.
나의 年代記는 航海日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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