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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맑은 바람 2022. 10. 2. 19:51

 

장 도미니크 보비/양영란 옮김/동문선/190쪽/1997.5 초판발행/2015.8 9쇄 발행/읽은 때 2022.9.30~10.2

장 도미니크 보비(1952~1997)향년 45세/1991년부터 '엘르' 편집장이 됨/1995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짐/3주 후 의식은 회복했으나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눈꺼풀뿐.

(우연히도 요새 읽은  <돌아가는 배>, <라면을 끓이며>, <잠수종과 나비>를 쓴 이들이 신문 기자 출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들이다.
글로 밥 먹고 살았던 사람들의 글이니 읽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그들은 현장에서 자나깨나 신선하고 읽을 만한 기사를 쓰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 아닌가.
게다가 도미니크 보비는 잠수종에 갇힌 몸이나 다름없어 한 줄 글을 토해 내려면 膏血을 짜내야 하는 고통을 겪었음에랴. 읽기 전부터 간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14)나는 腦幹 brain stem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날 심장 순환기 계통의 갑작스런 이상으로 이 기관이 고장나자, 비로소 나는 뇌간이라는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컴퓨터 장치의 핵이며, 뇌와 말단 신경을 이어주는 통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2)"바퀴의자를 타도 되겠습니다"
라고 재활의학자는 좋은소식을 전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내 귀에는 그 말이 최후의 선고처럼 들렸다. 단번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현실과 직면하게 된 셈이었다. 원자폭탄이 터진 것만큼 눈앞이 캄캄했다. 단두대의 칼날보다 더 예리한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27)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장 도미니크는 왜 이렇게 소상하게 자신의 장애를 표현했을까? 한 글자도 만들기 어려운데--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는 사람들아, 침을 잘 삼키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31)일주일에 한 번씩하는 목욕도 내게 절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 준다. 몸이 욕조 속에 잠기는 감미로운 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물장구를 칠 수 있었던 지난날에 대한 향수가 엄습한다. 따끈한 차나 한 잔의 위스키, 혹은 감칠맛 나는 책이나 수북한 신문더미를 벗삼아 발가락으로 수도꼭지를 조절해 가며 욕조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곤 했었다. 목욕의 즐거움을 상기할 때만큼 현재의 내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많지 않다.
(52-54)신경과 병동의 후미진 복도에 둥지를 튼 우리/날개 꺾인 새,목소리를 잃은 앵무새, 불길한 전조의 새, 뻣빳하게 굳어버린 몸/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농담을 하며 서로를 불러댄다. 나도 그 즐거운 북새통에 한몫 끼고 싶지만, 나의 한 개밖에 없는 눈이 그들에게로 향하는 순간 청년이며 할머니, 그리고 떠돌이 절름발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천장에 부착된 화재경보기만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아마도 불이 날까봐 무척 겁이 나는 모양이다.
(61-63)수호전사
상드린느의 하얀 가운에 달려 있는명찰에는 언어장애치료사라고 적혀 있지만, 수호천사라고 읽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내게 의사 소통체계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상드린느이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벌써 오래 전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을 것이다./하루에 두번 상드린느가 병실 문 안으로 들어와서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모든 불편함을 대번에 해소시켜 줄 때 느끼는 위안감은 말로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 몸을 항상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잠수종이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어지는 느낌이다./내 생일에 맞추어 상드린느는, 나로 하여금 남이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하게 알파벳을 발음하도록 하는 개가를 올렸다.이보다 더 값진 생일선물이 있을까.
(98)루르드 성지에서
나는 모스크바의 레닌의 묘지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긴 줄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순 없어"라고 내가 말하자, "유감이야, 자기처럼 신앙심이 없는 사람에겐 좋은 기회일 텐데"라고 조세핀은 응수했다. "그런 게 아니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건강한 사람이 여기 왔다고 치자. 기적이 일어나서 갑자기 사지가 마비되어 버릴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자가 이다지도 불경스러운말을 하는지를 보려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무섭다.하느님은 바로 소원을 들어주신 건가?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내게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말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말뿐더러, 남을 험담하는 말도 입에 담지 말랬다. 그 말은 공중에 떠돌다가 부메랑이 되어 도로 내게로 돌아온다고--)
(108)아버지의 날에 아들 테오필을 바라보며:
사실 나는 놀이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온다.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cm밖에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아빠이면서도 손으로 녀석의 숱많은 머리털 한번 쓸어줄 수도, 고운 솜털로 뒤덮인 아이의 목덜미를 만져볼 수도, 또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의 작은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아줄 수도 없다. 이런 기분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극악무도한? 불공평한? 더러운? 끔찍한? 순간적으로 나는 그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목에서는 그르렁거리는 경련이 터져나와 테오필을 놀라게 한다.
(113)감각 없는 내 손가락을 잡고 있는 실비와 나는 말이 없다.실비의 검은 안경 위로 맑은 하늘이 비친다. 실비는 산산조각이 난 우리의 삶에 숨죽이고 오열한다.
(120-121)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한 세간의 수근거림:
입이 백 개에 귀가 천개가 달린 도시라는 이 괴물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듯 떠들어대는 속성이 있으며, 나에게도 이 괴물은 여지없이 공격을 가했다./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B씨가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었다는데, 알고 있었어?" "물론이지" "맞아, 정말 식물인간이래" 마치 먹이를 발견하고 군침을 삼키는 독수리처럼 탐욕스럽게 그자들은 이 대화에 달려들더라고 친구들은 전해 주었다. 이 돌팔이 예언자에게는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치즈비스킷을 한입 베어 먹을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입에 올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조로 보아, 이제는 나를 인간이라기보다 과일이나 채소처럼 식물로 분류하는 게 현명하리라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다는 투였다. 요즈음은 전시가 아니라 평화시대라서 거짓 소식을 전한 자라도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내가 만일 나의 지적 잠재력이 시금치나 당근의 지적 능력보다 월등하게 우수함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의지할 데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다.
(기쁨을 나누면 질투를 사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본다.내 안의 사악함도 함께 본다)
(122-123)편지들
나는 뛰어난 편지들을 받아 본다.나는 내 스스로 편지를 한 통씩 정성들여 읽는다.어떤 편지는 아주 심각한 내용이다. 삶의 의미와 영혼의 고귀함, 인생의 오묘함 등에 대해 말하는 편지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와의 관계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이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경박하게 보이는 인간관계 밑에 인생의 깊이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토록 눈멀고 귀멀었던 것일까? 혹은 불행을 당해 보아야 비로소 진실한 사람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일까?

다른 편지들은 소박하게 시간의 흐름을 구별지어 주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해 준다.

저녁 해질 무렵에 꺾은 장미꽃, 비오는 일요일의 나른함, 잠들기 전 울음보를 터뜨리는 어린아이 등등 삶의 순간에서 생생하게 포착된 이러한 삶의 편린들, 한 줄기 행복들이야말로 나에게 다른 어느 무엇보다 깊은 감동을 안겨 준다. 나는 이 모든 편지들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언젠가 나는 이 모든 편지들을 한 장씩 붙여서 1km짜리 리본을 만들어, 우정을 찬미하는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말 많은 독수리들을 멀리 쫓아버릴 수 있을 텐데.
(171-172)내 삶 속의 어느 하루:**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1995년 12월 8일-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았던 마지막 날
늘씬한 갈색머리 여인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육체 곁에서 정상인으로서의 마지막 잠을 자고 눈을 떴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오히려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그 아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면도하기, 옷입기, 코코아 한 사발 마시기 등, 지금 생각하면 기적같이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모든 동작을 기계적으로 해치웠다./나는 왁스 냄새가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냄새/(헤어져 지내는 아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려고 새로 뽑은 BMW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중이었다)눈앞이 흔들거리는 듯하더니 머릿속도 멍해졌다. 그렇지만 BMW의 핸들 앞에 앉아 계기판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헤드라이트의 물결 속에서, 나는 내가 수천 번도 더 지나다녔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커브길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차가 한 대 지나칠 때, 나는 그 차가 두 대로 보였다./간호사인 처제 디안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갔다. 디안은 채 1분도 안 되게 나를 검사하더니, 이렇게 선언했다."병원으로 가야 해요, 최대한 빨리"/운전사는 자동차 경주 선수처럼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순식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잠시 후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실감나는 얘긴가. 스물아홉 겨울에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머리가 뽀개지게 아픈데, 진통제가 듣지를 않는다. 사물이 둘로 보이고 몸의 한쪽이 기울어진다. 나는 그때 뇌종양 판정이 내려져 수술을 받았다. 완전회복의 확율이 십만 명에 한 명꼴이라는데 나의 수호천사는 아이들을 마저 기르라고 나를 살려 주셨다. 난 그 후로도 45년을 더 살고 있다)
(188)열쇠로 가득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베르크 플라쥬, 1996년 7~8월

1997년 3월 9일, 장 도미니크 보비는 옥죄던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자유로운 그만의 세계로.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저자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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