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양영란 옮김/김영사/223쪽/1판1쇄 2021.8/읽은 때 2022.12.20~12.26
--늙음에 관한 시적이고 우아한, 결코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미국 이민/하버드, MIT 등에서 교수를 지내다 2010년 퇴임/외국어계열 학과장을 역임한 공로로 MIT는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상>을 제정,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젊은 인재들을 격려함/ 2017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선거참모로 활동함
(20-25)늙음은 이런 것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갈 때면 거의 매달리다시피 난간을 꽉 붙잡아야 했고 지하철 안에서는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어디를 가든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닳아버린 몸, 도대체 나는 어떻게 내 몸을 닳아버리게 했단 말인가?/최근 들어서 점점 더 뚜렷하게 느끼는 점은 정신마저 닳는다는 사실이다/어떻게 하면 스스로도 몰라보게 된 몸과 세상 앞에서 점점 더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겁많은 노파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엄청 끌리는군. 딱 나니까.나도 이 정도의 글은 눈 감고도 쓸 수 있다.다만 팔리는 책이 되려면, 이 작가 정도의 경력 소유자라야 김영사 같은 데서 눈도장 찍고 찜해 놓는 대상이 된다. 세상은 그런 것!)
(33)자유는 그저 "더는 잃을 것이 없다'의 다른 말이다--재니스 조플린
(36)내 삶의 방식에 대한 회한?
나는 나의 과거로부터 멀어졌고 살아가는 동안 계속 삶을 지워갔다. 어차피 모든 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그렇기 때문에 선수치는 편을,미리 도망치고, 단념하고, 거부하고,잊어버리는 편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제껏 악착같이 확보해 놓은 이 휑한 공백이 내 마음에 깃든 슬픔으로부터 전혀 나를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66-68)탈물질화한 권력의 가학적인 명령:
젊은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능숙하게 항해한다. 모두 지름길을 꿰고 있으며 숨이 멎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린다.--그들은 얼마나 자기들에게만 속하는 세상, 그들의 선배들은 더는 뭐가 뭔지 통제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나는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 사회, 우리가 이미 한 발은 들여놓은 이 미래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봐 두렵다.
(74-75)외모의 평준화, 발의 평준화?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이힐을 애용해 왔고, 예쁜 구두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애석할 수가. 내 발 또한 모양이 이상해지더니 결국 신체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 때문에 여름이면 무지외반증 탓에 툭 불거져 나온 발을 드러내는 샌들 착용을 더는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요즘엔 그래도 농구화나 슬립온이 유행이라 쓰라린 마음을 다소나마 위로해 주지만 말이다.
(여름이면, 실목걸이 같은 발찌를 한, 하얗고 자그마한 발이 샌들에 담겨 있는 걸 부러워만한 내 심정은 오죽했을라구)
(100-101)히피생활을 끝내다:
1960,70년대 이 시기는 마치 내 안에서 길고 그늘진 길 가운데 빛나는 하나의 중심처럼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 인생의 반항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까/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국가들에서는 우리(히피족)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시선도 견뎌야 했으며,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부르주아 분위기를 풍기는 대도시에서는 노골적으로 우리를 질타하고 거부하는 분위기도 감내해야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6,70년대. 스스로를 선구자요,개척자라고 믿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우리는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기존 질서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선구자요, 개척자로 살자니 늘 고단하고, 수중엔 돈 한 푼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므로, 우리는 안락한 삶을 동경하게 되었고, 우리가 추구하던 신이나 위대한 사랑 따위는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정부를 전복시키지도 못했으므로, 세상이 점점 더 폐쇄적으로 되어가면서 위험해졌으므로, 우리는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아기자기한 학교 캠버스로 돌아갔다.서른살이 될 무렵 나는 나이든 여자 히피가 된다는 건 상당히 비장해 보일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05)여행에의 미련
미래라고 하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짧은 여정만을 남겨두게 되면, 과거가 점차 존재감을 보이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떠올려볼 것을 종용한다./신비스런 이름으로 불리는 먼 나라와 도시를 찾아 떠난 기나긴 모험 여행은 나를 충만하게 채워 주었다. 그 여름, 이 추억들이 충격적인 강렬함으로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여행자의 욕망이 내게서 떠나가기 시작했음을.
(109)그럼에도 내 안에 욕망과 에너지가 남아 있는 한, 비록 예전에 비해서는 그 강도가 많이 약해졌을지라도, 계속 여행을 다닐 수 있기를 소망한다./앞으로도 내내 '마지막' 혹은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테지만 말이다. 이미 나는 가장 가까운 곳만 알아보고 있다.비행기를 열여덟 시간이 아니라 딱 세 시간쯤만 타면 갈 수 있는곳으로.
(111)문학에 기대어:
문학은 내 삶을 구원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기를 소망한다.다른 분야 책들도 내가 정말로 늙어버리게 될 끔찍한 겨울날의 고독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고 기대힌다.
(122-123)살면서 얻은 교훈의 상당 부분을 나는 문학 수업에 빚지고 있다. 몽테뉴는 자신과 대면할 용기를 가르쳐 주었고, 프루스트는 기억의 권능을, 토니 모리슨은 작열하는 문체로 진실과 정의의 의미를 귀띔해 주었으며 아니 에르노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씀으로써 세상을 포착할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대학교수들 가운데 하나인 캐럴린 하일부룬은 "우리는 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산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이었으며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문학은 늘 나를 지탱해 주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에게서 걸핏하면 '진짜세상'은 내팽개치고 책 속에만 틀어박혀 산다는 꾸지람을 들어온 나이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내가 게걸스럽게 읽고 열정적으로 토론해 온 많은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실존이라는 거대한 혼돈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나를 보호해 주고 교육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장애물 천지인 험한 길에 기꺼이 나와 동행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소중한 말들 덕분에 나는 꾸역꾸역 우직하게 장애물들을 넘을 수 있었다. 문학이라는 버팀목은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받쳐 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153-154)놀랍다, 동서양이 어찌 이리 똑 닮았는가!
우정의 두 번째 사막을 가로지르는 중인데, 이름하여 '할머니 정체성' 에서 기인하는 사막이다.
친구들은 일과 격한 감정들로 말미암아 바쁘고 정신없이 지내느라 정작 자식들과는 맺을 수 없었던 특별한 관계를 손주들과는 평온한 마음으로 유지해 가고 있다. 매사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 친구들은 남아도는 애정과 배려를 손주들에게 쏟아붓고, 손주들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인내심과 자부심을 발휘했다.할머니가 된 친구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똑 닮은,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자신도 닮은 손주들의 재롱 앞에서 끊임없이 감탄하고 놀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9-160)딱 우리 또래의 저자 이야기
요컨대 우리 모두는, 아직 먼 일이라고 애써 외면하면서도, 자살이나 스위스에서 이루어진다는 합법적인 죽음 프로그램의 장점 또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할 때--특히 잠자는 동안 숨을 거두는 호사--의 이점 등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데, 따지고 보면 벌써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다.
(178)누구나 하는 질문
'나는 과연 쓸모있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누구에겐가 영감을 주고, 그를 도와주었으며, 그를 변화하게 했는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엔 물론, 나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주는 졸업생들의 이메일--이 편지들은 내가 시도한 일들이 시간과 망각에 의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음을 알려주는 귀한 증거다--몇 통 외엔 똑 부러지게 구체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 또한 37년 교직생활이 보람된 것이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되는 두툼한 두 권의 학생들 편지모음을, 들쳐보지도 않으면서 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181-182)아, 어쩌면 이리 같을 수가!
진정한 슬픔,살 속을 파고들어 숨도 못 쉬게 하는 그런 슬픔이라면, 나는 쉰 살이 지나서 내가 키우던 고양이들이 죽었을 때 처음으로 경험했다.그때 나는 내 아버지와 통화한 내용까지도 다 기억난다. 아버지는 그 무렵 칸에 사셨는데, 자신이 기르던 닥스훈트 한 마리가 죽었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소리를 들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다. 우리에게는, 자식들에게는 전혀 감정 표현이 없던 양반이 그깟 개 한마리 때문에 그토록 통곡하다니. 정말 말도 안돼!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때 아버지 심정을 이해했다.
( 18년을 살고 떠난 두리(말티즈)와 12년을 마당을 겅중거리고 뛰어다니다, 신장이 망가져 차고에서 일주일이나 물도 못 넘기고 고생하던 금강이(알라스칸 말라뮤트)를 보냈을 때 가족들이 힘겨워하며 슬퍼했던 모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186-188)그날에 대처하는 나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천당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사람은 살고, 그러다가 죽는다고 믿는다. 지난 70년 세월 동안 나는 그럭저럭 살 생각만 해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여정의 끝을 상상하려니 그냥 상상이 안 된다./나는 안다, 나 자신이 절대 양로원 같은 곳에 내 한 몸을 의탁할 사람이 아님을, 아이고, 그런데 타이밍이 애매하다. 사람은 언제나 적시에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많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테지만, 막상 결정적 순간에 이르자 한번뿐인 목숨에서 아직 남아 있는 것,그것이 비록 잔인할 정도로 쪼그라들었을지언정,그것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마지막 페이지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위한 유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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