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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맑은 바람 2024. 3. 1. 22:07

--류시화 제 3 시집
문학의숲/146쪽/2012년4월23일1판1쇄/2012년4월29일1판5쇄/읽은 때 2024년 2월 28일 ~3월1일

류시화(1959~  )본명 안재찬/충북 옥천/경희대 국문과 졸/일본어,영어,인도어에 능통,번역서가 많음/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평론가는 원작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말을 비비꼬는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을 깬 사람을 만났다.
<문학마실>의 前 경희대 김종회 교수.
류시화의 시가 잘 안 읽히고 재미가 없어 누가 좀 도움말을 줄 사람이 없을까 해서 검색을 하다 만난 김종회교수는 류시화라는 인물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정제된 언어로  요약해 주었다.

(요약내용)
--시ㆍ번역ㆍ출판에 두루 미친 마이더스의 손, 류시화--

바깥길을 따라 쉽게 흘러가며 시를 읽는 사람은 그의 시에서 많이 얻어갈 것이 없으나 그 속의 길을 헤집고 행간에 묻힌 의미를 뒤쫒는사람은 그의 시 곳곳에 숨은 깊은 사유의 보석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시의 문면이 표방하는 '의미'는 쉬워 보이나 그 내부에 잠복해 있는 '의미화'의 영역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를 쓸 수 있는 아주 드문 시인이 류시화입니다. 그는 21세기에 주목할 시인 1위로 뽑혔습니다.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은 한 줄 한 줄이 거의 격언의 수준입니다.
제4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은 앞의 시집보다 더 유연하고 깊어진 언어로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채워져서 쉬우면서도 생각의 깊이가 幽玄한 것이 지금 그의 시세계입니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이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 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생각의 심층을 잘 갈무리한 언어의 균형감각 그것이 환기하는 맑고 값있는 정신세계에 류시화 시의 근본이 있다.
우주의 허공에 뜻을 두었으나 현실적으로 정확하고, 신비로운 명성으로 띠를 둘렀으나 건강한 상식에 발을 디딘 것이 류시화의 시입니다.
여러분, 그의 시집을 손에 들고 우리 문학의 문전에 걸린, 눈이 시리도록 푸른 등불 하나를 바라보는 지금 이 행복이 너무 소중합니다.---김종회 평론가

(50)당나귀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르둥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들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華嚴:여러 가지 수행을 하고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일/분별과 대립이 극복된 이상세계/꽃으로 장식된 세계/화엄세계의 절정은 곧 사랑
(산토리니- 가파르고 좁은 골목 계단을 등짐 한무더기 지고 지척거리고 걸어가던, 노쇠한 당나귀의 모습이 떠오른다)

(79)살아 있는 것 아프다
밤고양이가 나를 깨웠다
가을 장맛비 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 있는 것 다 아프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

그날 밤 별똥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나는 낯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94)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무당벌레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삶이 더 가벼울 것이라고
더 별의 눈동자와 닮을 것이라고
멀리 날지는 못해도 중력에
구속 받지 않을 만큼은 날 수 있다
혼자 혹은 무리 지어 날 만큼은
아무도 그 삶에 개의치 않고
언제든 원하는 장소로 은둔하거나 실종될 수 있다
명색이 무당일 뿐 이듬해의 일을 점치지 않으며
죽음까지도 소란스럽지 않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도착한다
운 좋으면 죽어서 날개하늘나리가 될 수 있고
더 운 좋으면 무로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결말이 기다린다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까
아니, 기꺼이 원하니까
큰 순환에 자신을 내맡기는 기술은
이들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
지구에서 일만 오천 일을 머물면서도
내가 배우지 못한 것이 그것이니까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손등에 날아와 앉은 칠성무당벌레와 삶을 바꾸고 싶다고
나는 아무것도 손해 볼 것 없지만
무당벌레는 후회막급이리라
그에게는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겠지만
나에게는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할 테니까

(108)눈송이의 육각 결정체를 만든 손이
눈송이의 육각결정체를 만든 손이
수없이 반복한 끝에 여치의 뜀뛰기를 조절한 감각이
파도의 생애들마다 다르게 창조한 눈매가
콩들을 나란히 꽁깍지에 앉힌 안목이
너를 만들었다

그 안에서 은하가 회전하는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거인이
방랑하는 별을 붙잡아 보름달과 초승달을 깎은 장인이
사막의 눈썹 긴 낙타에게 혹을 선물한 현자가
야생 기러기들의 길을 안내하는 네 방향의 바람이
너를 이곳에 초대했다

너는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지 망설인다
노래 부르기 위해 한 방울의 물만 필요한 찌르레기와
돌이끼를 먹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산양과
장미의 꿀물을 빨아먹음으로써 장미가
입술을 벌릴 수 있게 도와주는 개미들을 보면서도

몇 생을 걸려 달에 도착하는 달나방을 데려온 이가
먼지를 모아 반딧불이와 올빼미를 탄생시킨 손길이
은하의 회전축을 본떠 곰의 팔꿈치를 만든 판단이
사마귀의 길고 가느다란 목 끝에 눈을 얹은 눈썰미가
너를 이곳에 있게 했다.

진정으로 산 삶과 그냥 살아진 삶 사이에서
그냥 사라진 것들과 네 안에 나이테를 새긴 것들 사이에서
네가 올라온 진화의 모든 사다리들마다에서
박수를 쳐 준 이가
파도 속에 소금을 녹이는 이가
너를 이곳에 데려왔다
(驚異 그 자체!)

(110)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116)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잡고 해마다
두꺼비와 가시연꽃과 붉은가슴도요새가 나온다
무당벌레와 흰올빼미도 나온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우리집 마당에도 하늘이 기르는 풀들[잡초]이 제법 많다. 달개비도 그 중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참 묘하게 아름답네 하면서 독사진 한 번 찍어준 적이 없다.)

(146)산이 다하고 물이 돌아나오는 곳에 이르러 다시금 시인으로서 거듭남을 선언하는 이번 시집을 읽는 것은, 마치 '꽃잎 하나 띄우고 흘러나오는 청량한 슬픔'을 마시는 듯하다.이 꽃물 밴 청량한 슬픔이 독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리라 믿는다.---시인 이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