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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 <자기앞의 生>( La Vie devant Soi)

맑은 바람 2024. 2. 22. 13:14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장편소설/용경식 옮김
/문학동네/357쪽/2003.5초판/읽은 때 2024.2.21~2.22

(11)하밀 할아버지:양탄자 행상/할아버지는 눈이 아주 아름다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하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매일 웃고 있어요?"
"나에게 좋은 기억력을 주신 하느님께 매일 감사하느라고 그러지, 모모야 "
내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어린애 취급해서 항상 모모라고 불렀다.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의 정신적 스승이다. 그에게서 글을 배웠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12-13)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박하차만 한 모금 마실뿐이었다.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 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31)죽기 전까지 100%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인생에는 원래 두려움이 붙어다니게 마련이니까.
(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두려움이라는 거, 모든 이들이 늘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구나. 그래서 'Don't worry, Be happy! '하는 게야)
(44)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46)하밀 할아버지는 알제리의 성인인 시디 우알리 다다의 그림이 그려진 양탄자를 갖고 있었다.시디 우알리 다다는 물고기가 짰다는 기도용 양탄자 위에 앉아 있다.물고기가 허공에서 양탄자를 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종교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것이다.
(55)사람은 꿈을 많이 꿔야 빨리 자란다고 했는데,보로라는 사람의 주먹이 그렇게 큰 걸 보면, 그의 주먹은 쉴새없이 꿈을 꾸었나 보다.
(61)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69)로자 아주머니의 지하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93)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 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95)로자 아줌마:95kg의 드럼통인 로자 아줌마에게 생활비를 아끼려면 덜 먹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혼자뿐인 노친네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99-100)마약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어본 후에야 그놈의 행복이란 걸 겪어볼 생각이다.
(116)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141)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하밀 할아버지는 말(언어)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164)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174)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 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175)노인들은 겉으로는 보잘것없이 초라해보여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 그들도 여러분이나 나와 똑같이 느끼는데 자신들이 더이상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보다 더 민감하게 고통받는다. 그런데 자연은 노인들을 공격한다.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라서 그들을 야금야금 파먹어 간다.우리 인간들에게 그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인을 안락사 시킬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179)하밀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시인들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가 나를 빅토르라고 불렀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웃음이 났다. 어쩌면 신이 할아버지를 통해 시인이 되라는 계시를 내게 주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상상 속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희고 붉은 새들을 보았다.새들의 발에는 내가 함께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열 살밖에 안 된 모모가 저를 거두어준, 못생기고 뚱뚱한 데다 치매증세를 보이는 로자 아줌마를 곁에서 지키며 밑까지 닦아주는 행위야말로 'Pass it on'(미국발음 '패시란' 받은 대로 갚으라)의 고결한 정신이 아닌가!)
(202)로자 아줌마의 유언:
--병원에 절대 보내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병원이란 데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법이 그러니까.나는 필요 이상 살고 싶지는 않다.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그들은 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온갖 학대를 다 할 거다.의사는 처방전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 그들은 끝까지 괴롭히면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을 거야.그것이 그들의 특권이니까. 나를 병원으로 옮긴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네 친구에게 부탁해서 내게 주사를 한 대 놔주렴(마약).그리고는 시골에 내다버려 줘. 숲에다 버려줘,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전쟁 후에 한 열흘간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 공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더구나. 내 천식에는 도시보다 그곳이 훨씬 좋을 거야. 내 엉덩이를 삼십오 년 동안 손님들에게 내주었는데, 이제 와서 또 의사들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아.약속해 주겠지?"
(231)죽어가는 사람도 병원을 싫어한다:
병원에 갔다 하면 아무리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 해도 안락사를 시켜주지 않고 살덩이가 아직 썪지 않아 주사바늘 찌를 틈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억지로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최후의 결정은 의학이 하는 것이고, 의학은 하느님의 의지와 싸우려 한다는 것을.
(232-233)가사 상태에 빠진 로자 아줌마:
나는 오줌도 누러 가지 않고 과자 한 조각도 먹지 않은 채 꼼짝 않고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볼 수 있도록. 나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리를 갈라놓으려하는그 푸짐한 살 위에서도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242)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밖에 내고 나면 별개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252)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집으로 향했다.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있고 싶다는 것.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아파트에는 대부분 '똥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그들은 로자 아줌마가 돈도 없고 일어날 힘도 없게 되자 서로들 와서 그녀에게 위로를 주었다. 한때는 세네갈의 권투 챔피언이었던 여장남자 롤라 아줌마--그녀는 로자 아줌마를 씻기고 입히고 향수까지 뿌려준다. 체격이 말할 수 없이 좋아서, 95kg의 로자 아줌마를 꽃송이 받들듯 안고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자움 씨네 사형제, 악단을 거느리고 북을 두드리며 거리에서 불쇼를 하는, 쓰레기 청소부 왈룸바 씨, 프랑스 인이면서 동병상련을 드러내는 샤르메트씨-- 노구를 이끌고 칠층을 오를 수 없어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진찰하러 오는 카츠 선생님--그들의 삶 자체가 꽃이다.)
(264-265)로자아줌마는 내가 이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예요.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 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271)로자 아줌마;
그녀는 화장을 했다.아줌마는 여전히 여자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아무리 못생겨도 손질을 하면 조금은 나아 보이는 법이다.그녀는 거울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녀가 자기 모습을 보고 끔찍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275)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301)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 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내 주위의 촛불이 꺼졌다. 나는 다시불을 붙였다.
---가끔씩 일어나서 로자 아줌마의 눈 앞에 히들러 사진을 가져다 대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않았다.
(삼 주일(?)후 냄새의 근원지를 찾다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모모는 발견되고 그는 나딘 아줌마의 별장으로 가게 된다.)
(307)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없다.
(내용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데,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아우야, 번역을 잘해줘서 넘 고맙다.문맥이 매끄럽고 가끔 폭소를 터트리게 하는 대목들을 만나니 더욱 즐겁구나)

(336~342)로맹가리 연보


1914년 모스크바에서 출생/유태인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니스에 정착/어머니는 늘 어린 로맹가리에게 성공하고 행복해지려면 프랑스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함/수줍음 많고 순종적이었으며 글짓기를 잘함/2차대전에 공군으로 참전,뢰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음 /외교관이 되어 미국 주재 프랑스 총영사가 됨/31세에 <유럽의 교육>(분노의숲)으로 비평가상 수상/42세에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 수상/45세에 21세인 헐리우드의 스타 진 세버그를 만나 결혼한다./61세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앞의 생>으로 두 번째 콩쿠르상을 받는다(1975년)/1979년 진 세버그 약물 과다 투여로 사망/1980년 로맹가리 나이 66세에 권총자살한다./로맹가리의 짤막한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356)<자기앞의 생>은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범한 일이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모모는 내게 말해 주었다.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조경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