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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 <산촌여정(山村餘情)>

맑은 바람 2024. 3. 4. 16:41

--이상 산문선--
이상 지음/권영민 엮음/태학사/189쪽/초판1쇄 2006.9/읽은 때2024.2.23~3.4

李箱(1910~1937) 향년 27세
본명 김해경
대표작으로 시 <오감도>, 소설 <날개>가 있다.
마지막 작품에 <종생기>가 있다.

(6)좋은 글에는 향기가 있다. 좋은글에는 글쓴이의 체취가 있다. 그 시대의 풍경이 배경에서 떠오른다. 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진정한 의미의 '옛날'이란 언제나 살아있는 '지금'일 뿐이다.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정민ㆍ안대회)

제1부
*山村餘情(*成川 기행 중의 몇 절)
*성천은 평안남도에 있음/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
(34)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빛 여주가 열렸습니다. 땅콩 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 빛을 배경으로 하는 한 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담황색에 반영되어 세실 B.데일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사치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쌍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당시 여건이 허락되었다면 李箱은 세계일주를 떠났을 사람입니다. 그의 안에 세계가 들어있군요)
(36-37)염소 한 마리: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세루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라드로 싼 것 같이 맑고 총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桃色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三停과 五岳이 고르지 못한 貧相을 업수이 여기는 중입니다.
(사전에도 없는 '삼정과 오악'이 무슨 뜻일까? 국어연구회에 물어볼까, 쳇gpt에 물어볼까?)
(37)옥수수밭은 일대 觀兵式입니다.바람이 불면 *甲胄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 빛 꼭구마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갑주:갑옷과 투구/ 카-마인 빛 꼭구마:
(20대에 읽었어야 할 이상의 수필을 나이 팔십을 바라보며 벌 서는 기분으로 인내하며 읽는다. 번연히 우리말인데도 왜 이리 읽기가 힘들까, 더구나 1930년대 대표작가의 글을!)

*권태(이상의 마지막 작품, 이듬해(1937년)에 그는 죽었다./성천 팔봉산 자락에서 겪었던 일을 일본에 가서 썼다?)
(49)장기두기: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한 번쯤 져주리라.---그러나 일부러 져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소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가 없나?
(57)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 하자.
(66-67)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等待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1936년12월19일 未明 東京에서

제2부
*보험없는 화재
*斷指한 처녀
*此生輪廻
(80-81)길을 걷자면, '저런 인간을랑 좀 죽어 없어졌으면'하고, 골이 벌컥 날 만큼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아도 좋을, 산댔자 되레 가지가지 해독이나 끼치는 수밖에 재주가 없는 인생들을 더러 본다.가령 유전성이 확실히 있는 불치병자,광인,주정 중독자,걸인 등 다 자진해서 죽어야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종의 권력으로 일조일석에 깨끗이 소탕을 하든지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걸인도 없고 병자도 없고 범죄인도 없고, 하여간 오늘 우리 눈에 거슬리는 온갖 것이 다 깨끗이 없어져 버린 타작 마당 같은 말쑥한 세상은 만일 그런 것이 지상에 실현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권태 그것과 같은 세상일 것이다.그러니까 자선가의 허영심도 채울 길이 없을 것이고 의사도 변호사도,아니 재판소도 온갖 것이 다 소용이 없어질 것이고, 따라서 그날이 그날 같고 이럴 것이니 이래서야 참 정말 속수무책으로 바야흐로 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이런 春風颱蕩한 세월 속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부스럼이라도 좀 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부끄럽게 여기고 이것을 이기지 못하여 천하 만민 앞에서 아즤 깨끗하게 일신을 자결할 것이고 또 그런 세상의 도덕이 그러기를 무언 중에 요구해 놓아둘 것이다.  *春風颱蕩:봄바람이 온화하게 분다는 뜻
그게 겁이 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천하의 어떤 우생학자도 행정자에게 대하여 정말 이 '살아 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을 일제히 학살하도록 제안하거나 요구치는 않나 보다.
(이런 생각을  당시 신문(매일신보1936.3.3~)에 버젓이 올릴 수 있었다니!  만약 지금 그런 글을 썼더라면 그는 악성 댓글에 시달려 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이상이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저 유럽을 휩쓴 광인 히틀러의 만행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이상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空地에서
*도회의 인심
*骨董癖
*童心行列
*西望栗島
*女像
*秋夕揷話
*求景
*예의
*奇與
*실수
*행복
*藥水
약수보다는 약주를 좋아한다는 이상-약수를 잘못 먹고 문제가 되는 경우는 있어도, 술먹고 후회하는 사람은 못 봤단다. 애주가의 詭辯(?)
*EPIGRAM 뜻:警句
*19세기식
*동생 옥희 보아라
--애인을 따라 몰래 북행 열차를 타고 떠나버린 여동생에게 띄우는 편지--
(151-159)옥희야! 내게만은 아무런 불안한 생각도 가지지 마라! 다만  청천벽력처럼 너를 잃어버리신 어머니 아버지께는 마음으로 잘못했습니다고 사죄하여라.
나 역시 집을 나가야겠다.열두 해 전 중학을 나오던 열여섯 살 때부터 오늘까지 이 허망한 욕심은 변함이 없다.
---갔다와야 한다. 갔다 비록 못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서도 옳은 일을 하였다. 열두 해를 두고 벼르나 남의 맏자식된 恩愛의 정에 이끌려선지 내 위인이 변변치 못해 그랬던지 지금껏 이 따에 머물러 굴욕의 조석을 送迎하는 내가 지금 차라리 부끄럽기 짝이 없다.
--허허벌판에 쓰러져 까마귀밥이 될지언정 이상에 살고 싶구나.
--이왕 나갔으니 집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너희들의 부끄럽지 않은 성공을 향하여 專心을 써라. 삼 년 아니라 십 년이라도 좋다. 패잔한 꼴이거든 그 벌판에서 개밥이 되더라도 다시 故土를 밟을 생각을 마라.
너희들이 국경을 넘던 밤에 나는 酒席에서 올림픽 보도를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썪어서는 안된다. 당당히 이들과 列하여 똑똑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신 차려라!
신당리 버티고개 밑 오동나뭇골 빈민굴에는 송장이 다 되신 할머님과 자유로 기동도 못하시는 아버지와 오십 평생을 고생으로 늙어 쭈그러진 어머니가 계시다. 네 전보를 보시고 이분들이 우시었다.
--원래가 蒲柳之質[가냘픈체질]로 대륙의 혹독한 기후에 족히 견뎌낼는지 근심스럽구나.특히 몸조심을 잊어서는 안된다.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아리 하나가 유일 최후의 자산이니라.
편지하여라.
이해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오 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준 옥희, 방탕불효한 이 큰오빠의 단 하나 이해자인 옥희, 이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만리이역 사람이 된 옥희, 네 장래를 축복한다.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쓴다.
(이 글은 1936년 9월 <중앙>에 발표된 공개 서신이다)

(작품으로 만났을 땐 비상식적인 듯싶은 작가 이상--그런데 동생 옥희에게 보내는 글은 아주 상식적이고, 집안의 장남으로서 겪는 고민과 어려움 등이 소상히 잘 드러나 공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