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방/애송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맑은 바람 2009. 1. 16. 21:45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    )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 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엔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 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 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 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 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 버릴 때, 잊어 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 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移轉(이전)의 순간,

 

다 잊어 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飛翔(비상)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당선작)

 

 

 

***오 시인은 '아기를 낳는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한다.

지금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의 조그만 마을에 귀향,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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