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 )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 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엔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 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 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 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 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 버릴 때, 잊어 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 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移轉(이전)의 순간,
다 잊어 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飛翔(비상)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당선작)
***오 시인은 '아기를 낳는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한다.
지금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의 조그만 마을에 귀향,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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