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방/애송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맑은 바람 2009. 1. 16. 22:20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 이리라

 

(백석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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