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LA에 살고 있는 친구가 왔다.
친정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몇 달 전 친정아버지는 폐암 선고를 받았다.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걸 아신 후 아버지는 자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 생전에 이웃을 위해 크게 한 일도 없는데 죽은 몸으로나마 사회에 작은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러니 어디 시신 기증할 데를 좀 알아봐 다오.”
자식들은 기가 막혔지만 간곡하신 당부의 말씀이라,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어느 대학병원에 시신기증 약속을 받아냈다. 사회에 작은 빛을 던지고 자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깊은 뜻이 있으셨던 것 같다.
죽음에 임박해서 안타까울 정도로 삶에 애착을 보이며 몸부림치는 사람,
회생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로 자손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
정신적 물질적으로 환자나 가족이 다같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사람--
이런 삶들을 생각하니 친구아버님의 죽음이 더없이 고귀하게 생각됐다.
지난 일요일, 시어머님 산소를 찾아뵈었을 때, 언덕배기에 앉아 친척 한 분이 넋두리처럼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성묘도 이제 우리 때까지나 하는 거고, 자손들 대에 가서는 산소도 부담스러운 것이 될 텐데 어서 납골당이라도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