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한 폭의 투명하고 빛 고운 수채화가 있다.
스물여섯 나던 해 봄---
애송이 선생 시절이라 매사에 서툴지만 한창 열성을 부릴 때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삼월 중순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 날도 따로 할 일도 없는데다, 환경미화 심사일이 임박했기 때문에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엘 갔다.
몇 분 선생님도 같은 사정으로 학교에 나와 계셨다.
잘 아는 총각선생님도 눈에 띄었다.
교실로 교무실로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낯선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때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총각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더니 고등학교 때 친구라며
낯선 얼굴을 소개했다. 미대 졸업반인데 환경미화 좀 도와 달라고 데려왔단다.
그 남자는 그림 그리던 손을 멈추고 붓을 든 채로 내게 시선을 보냈다.
짙은 회색 골덴 자켓에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 진바지를 입은 그는
내가 눈인사를 보내자 수줍은 듯 웃는데, 설멍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형형했다.
그때 문득 이 남자가 내 옆에 서면 '미루나무에 매미 붙은 꼴'이겠군 하는 생각이 스쳤
다. 그날 이후 난 그 남자에 코 꿰어, 이날 입때까지 해로하고 있다.
지금도 미루나무가 바람에 뒤척일 때마다 매미는 매-엠맴 자지러지게 울고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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