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면 통과의례로 하는 환경조사가 있었지--
라디오까지는 당연히 있는 걸로 치고 테레비 있는 사람, 전화 있는 사람, 피아노 있는 사람,
자가용 있는 사람을 하나하나 손들게 하고 부모님 학력도 손을 들게 해서 조사하지 않았나 ?
지금은 그런 ‘세간 조사란’은 있지도 않고 부모님 학벌이나 직업도 환경조사서에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는데, 그 옛날엔 그런 걸 시시콜콜히 손 들게 해서 조사를 했으니 지금 그런 식으로
환경조사를 했다가는 인권 침해라고 항의 받을 일을, 그때는 가진 게 없어 부끄러워도 대거리 한 번
못하고 꾸벅꾸벅 따랐을 뿐이다.
허기사 지금 세간 조사를 실시하면 품목이 수십 수백 가지가 되어 거의 조사가 불가능할 것이다.
냉장고, 냉동고, 김치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 장식장 속의 가지가지 찻잔, 술병--등등의
주방용품에서부터 거실의 테레비, 오디오 세트.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벽을 가득 채운 책들,
컴퓨터, 가치도 알 수 없는 도자기류--
장롱을 열어보라.
몇 해째 입지도 않는 옷들이 한 보따리는 족히 쏟아져 나올 테고
또 서랍 속에서 마냥 잠자고 있는 물건들--유행 지난 썬글래스, 여행지에서 푼돈 주고 사온 열쇠고리,
종, 장식용 접시, 각종 문구류 들--
화장품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곱든 아니든 찍어 발라야 하니까 필요한 것들이 여나믄 가지나 되고
거기에 하나둘씩 모인 향수병들, 비싼 것은 아닐지언정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종류별로 있다.
돈이나 물건을 넣어 두기 위해서도 또 얼마나 여러 가지를 사들였나-동전지갑, 지폐지갑, 서류가방,
핸드백, 숄더백, 배낭, 트렁크--
신발장을 들여다보면 어떻구-사계절의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계절별 신발에다 산에 갈 때,
바다에 갈 때 필요한 신까지 식구대로 갖추어 놓아 보통 스무 켤레 안팎은 된다.
창고와 베란다 구석구석엔 또 뭐가 있나?
버리자니 아깝고 자주 쓸 일도 없는 물건들이 얌전히 제 차례 불러줄 때 기다리고 있다.
또, 좀 싸게 사겠다고 월 마트니 이 마트니 가면 낱 개 품목보다 두세 개씩 묶어 파는 것이
많아 당장 필요 없는 것들도 사다 쟁여 놓는다.
--물질이 넘친다. 가진 게 너무 많다. 깔려죽을 판이다.
그러다보니 뱃속에도 필요 이상으로 집어넣고 만병에 시달리며 살과의 전쟁까지 선포하는 게 아닌가?
이제는 그만 돌아보고 하나하나 모든 걸 정리하며 비워 갈 때가 된 것 같다.
무소유의 평안을 위해---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큰 행복이다.“
--그리이스의 어느 현자의 말
(200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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