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경복궁과 창덕궁 중간쯤에 위치한 옛날 동네다.
그리고 집은 4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동향 건물인데 동쪽 벽의 2/3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우유빛 창문을 활짝 열면
한 폭의 풍경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바로 코밑에 전통한옥 여남은 채가 얌전히 엎드려 있는데
요새는 지붕 위에 빨간 ‘고추말리기’가 한창이다.
그 너머 헌법재판소가 보이는데 전에 창덕 여고가 있던 자리라, 오래된 백양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많아 다투어 가을빛을 뽐내고 있다.
시선을 좀더 멀리 두면 현대사옥이 보이고
동대문 밖 낙산까지 조망이 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확 트였다.
밤이면 두산타워의 첨탑이 영롱하게 불을 밝히고,
달이 좋은 밤이면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마냥 달빛에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때는 여명의 시간.
슬금슬금 빛이 들어와 아침잠을 깨운다.
낙산 위로 붉은 빛이 감도는가 하면 어느새 덩실 해가 떠올라 방안 가득 빛을 쏟아 붓는다.
그 순간, 오늘 하루도 복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원이 절로 나온다.
물론 한 여름,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화장을 하는 때는
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 괴로운 순간들도 있지만--
어쩌랴, 세월을 거역할 수 없는 미물인 것을.
그렇더라도 지금 나는,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창을 통해 즐기며,
낮은 집들이 빚어내는 복을 누리고 있다.
20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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