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그림이 있는 방**

맑은 바람 2009. 5. 7. 23:53

 

 내가 사는 곳은 경복궁과 창덕궁 중간쯤에 위치한 옛날 동네다.

그리고  집은 4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동향 건물인데 동쪽 벽의 2/3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우유빛 창문을 활짝 열면

한 폭의 풍경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바로 코밑에 전통한옥 여남은 채가 얌전히 엎드려 있는데

요새는 지붕 위에 빨간 ‘고추말리기’가 한창이다.

그 너머 헌법재판소가 보이는데 전에 창덕 여고가 있던 자리라, 오래된 백양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많아 다투어 가을빛을 뽐내고 있다.

시선을 좀더 멀리 두면 현대사옥이 보이고

동대문 밖 낙산까지 조망이 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확 트였다.

밤이면 두산타워의 첨탑이 영롱하게 불을 밝히고,

달이 좋은 밤이면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마냥 달빛에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때는 여명의 시간.

슬금슬금 빛이 들어와 아침잠을 깨운다.

낙산 위로 붉은 빛이 감도는가 하면 어느새 덩실 해가 떠올라 방안 가득 빛을 쏟아 붓는다.

그 순간, 오늘 하루도 복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원이 절로 나온다.

 

물론 한 여름,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화장을 하는 때는

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 괴로운 순간들도 있지만--

어쩌랴, 세월을 거역할 수 없는 미물인 것을.

 

그렇더라도 지금 나는,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창을 통해 즐기며,

낮은 집들이 빚어내는 복을 누리고 있다.

20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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