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카모마일 한 잔을 앞에 놓고 며칠 전의 해프닝을 떠올린다.
눈발이 풀풀 날리는 저녁-
한동안 안 보면 궁금해지는 친구들을 만나 중앙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고 저녁을 먹으러 명동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그 옛날’ 잊을 수 없던 <명동칼국수> 집으로 발을 옮겼다. 날씨 탓으로 국수 생각들이 더 난 걸까? 이층과 아래층 입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럴 때 줄을 잘못 서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어서 눈치껏 1층 줄에 섰다.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다. 전에는 닭고기 국물에 건더기도 듬뿍 들어 있어서 진한 국물 맛을 즐겼는데 지금은 그런 맛이 없어졌는데도 웬 사람들이 이리 밀려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밤마다 돈다발 위에서 싱글거리는 주인 얼굴이 떠올라 잠시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식후엔 60년대 우리들의 수다방이었던 ‘그 옛날’ 찻집으로 향했다. 입구의 간판에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숫자가 적혀 있는 이층 찻집으로 올라갔다. 중국대사관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는 이미 누가 앉았고 우리는 명동 골목 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찻집의 브랜드라 할 만한 <비엔나커피> 두 잔에 <카모마일> 한 잔을 주문했다. 비엔나 커피 맛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걸름망 안에 있는 카모마일 알갱이들이 너무 풀어져 있고 그 후줄근한 건더기를 왜 또 그렇게 수북히 담았는지- 얼핏 보기에 이미 한차례 사용한 것들을 모아서 물만 새로 부은 것 같았다. 주인을 불렀다.
“이거 한번 쓴 걸 또 사용한 것 같은데요?”
50 안팎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주인 남자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면서 핏대를 올린다.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리들 하고 있느냐는 투로 역정을 낸다. 그러더니 가서 주전자와 잔과 카모마일 병을 통째로 들고 와서는 투박한 손으로 새 잔에 카모마일을 한줌 덥석 집어넣고 물을 붓는다. 알갱이들은 보란 듯이 둥둥 떠서 좀처럼 내려앉지 않는다. 금세 풀어질 리가 없다.
“봐라, 이렇게 내려앉는 데 한참 걸리는데 아까 그건 다 가라앉아 있었잖니? 물도 진하고-”.
주인남자는 카운터에서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지 다시 씩씩거리며 주전자와 병과 잔을 들고 온다.
“물이 미지근해서 그래요. 자, 이렇게 뜨거운 물을 부으면 곧 가라앉잖아요.“
그러나 주인 말처럼 알갱이들은 금세 가라앉아 주지를 않았다. 피차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주인 남자는 말이 더 빨라지고 많아지고---드디어는 폭탄선언을 한다.
“나가쇼, 돈도 필요 없으니까 얼른 나가슈!”
“모처럼 옛날 생각하면서 차 한 잔 하러 들어왔는데 왜 그러세요?”
“나, 그런 거 몰라요.”
손사래를 치면서 빨리 안 일어나면 쫓아낼 기세다.
우리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없이 자리를 떴다.
집에 돌아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영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영감, 한마디 툭 던진다.
“할망구들, 망신당하고 쫒겨났다는 얘기구나!”
이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주인 남자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오죽 답답했으면 차값도 안 받겠다고 했겠는가. 상대방 말은 아랑곳않고 내 생각만 우겨댄 게 아닌지--
‘카모마일 다, 너 때문이야.’
(2010.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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