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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수필춘추 >신인상

맑은 바람 2010. 7. 25. 13:02

 

 ***<수필춘추> 2007년 겨울호에 수록***

 

 삼청동 어느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무 명 남짓한 시인들이 한 해 동안 쓴 시를 모아

시화집을 엮고 낭송회를 여는 자리였다.

새로 자리를 함께한, 그 자리에선 꽤 젊은 편인 여성이 시 한 편을 골라들고 읽기 시작했다.

 ‘미루나무 첫사랑’

두어 줄 읽는가 싶었는데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글씨가 잘 안

보여서--라고 한다. ‘어? 돋보기 쓸 나이는 아닌데’ 속으로 의아해하며 자세히 보니

눈시울이붉다.

눈물이 고여 글씨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나본데--”

시인들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한 마디씩 한다.

이때 그 시를 쓴 시인이 시상이 떠오르게 된 사연을 얘기한다.


동네 미장원엘 갔더니 옆자리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머리를 하고 있더란다.

곱상하게 생긴 분이 정성스레 머리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 고와 보여 말을 건넸다.


“할머니, 그렇게 예쁘게 꾸미고 누구 보여주실라구요?, 할아버지 보여드릴려구 그러세요?”

했더니 

“영감은 벌써 10년 전에 죽구 없어, 생각두 잘 안나. 죽기 전에 한번 꼭 보구 싶은 사람이

있기는 있어”

“그게 누군데요?”

“첫사랑이야, 내가 처음 사랑했던 사람이 자꾸 생각 나구 한번 꼭 보구 싶어”

“그분은 살아 계세요?”

“응, 알아 봤더니 대구에 살구 있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약간의 충격과 함께,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구나’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 뒷전에서 조용히 시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갤러리 주인이기도 한 의사선생님이

입을 여셨다.


“아, 사람이 몸이 늙지 맘이 늙나? 누구나 첫사랑은 언제나 보고 싶은 거지.  내 나이 지금

일흔셋이지만 첫사랑이 보구 싶어 수소문했더니, 미국에 살고 있다구 하데. 서울에 오거들랑

한번 보자구 연락해서 지난 9월에 만났어”

“와- ”

시인들은 부러운 호기심으로 여쭤봤다.

“그래, 만나시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좋지 뭘, 이십대로 돌아가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길 나눴어. 나보고 예술가처럼

변했다구 하데“


첫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분이 참 행복해 보였다.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늦가을엔  첫사랑이 더욱 생각나는가 보다.

나도 가슴 시리게 그리운 첫사랑 하나 간직했더라면--

십대 이십대를 거치면서 가슴에 품어본 사랑이 왜 없겠느냐마는 잠시 품었다가 내려놓곤

했던 짝사랑이었다.

남녀공학을 다녔지만 고등학교 시절엔  동갑내기는 안중에 없고 선생님을 열렬히 사모해서

편지도 보내고 몰래 숨어서 보곤 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와 호감이 가는 인물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 생각조차 그때는 사치스런 감정

같았다. 없는 집에서 어렵게 공부시키는데 ‘연애질’이나 하는 것은 부모님께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런 감정을 억누르곤 했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에다  외모도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으니 적극적으로 사귀자고 달려드는 이도 없긴 했지만.


그러나 내 나이 스물여섯에 만나 운명적인 만남의 예감으로 결혼에 이른 남자가, 첫사랑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연두빛 사랑의 감정을 키워 준 그 선생님이

어느 수업시간에 우리에게 들려준 한 말씀은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선생님 말씀이, 적어도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흙냄새를 맡고 자연 속에서 강하게

단련된 사람이라야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만났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정서적으로도 풍부하다고 하셨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마음의 우상이 들려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 가슴에 와 꽂히지 않았겠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 자신의 얘기를 하신 거여서 웃기는 했지만 그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수영 강습이라는 걸 받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물개처럼 수영을 하지 않나, 주말이면 도시

사람들이 교외로 빠져 나가 등산하는 걸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막상 함께 산에 오르면 

다람쥐처럼 날래게 앞장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한다. 대자연이 품은 강과 시내와 산이 길러낸

사람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자잘한 일에 통 무신경한 듯싶어 짐짓, 돌아오는 생일날엔

꽃 한 송이 받아보고 싶다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더니 들꽃 한 묶음을 꺾어다가 슬그머니

벽에 걸어놓는다. 충청도 토종 촌 남자가 순서울산 여자의 비위에 맞을 리 없고 입장을

바꿔도 매한가지다. 다만 두 개의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기 위해 부단히 간격을 좁혀 나가는 노력을 할 뿐이다.

 

첫사랑-나이 들어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 참 가슴 설레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삼십 년

넘도록 티격태격하고 몸과 마음 부대끼며 살아온 지금의 남자를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여기고 매일매일 사랑의 혼불을 밝혀야겠다.

입동도 지나고 이제 겨울마차가 저만치서 다가오는 11월 중순-

오늘 따라 덕수궁 은행잎이 찬바람에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내 가슴은 더욱 빨갛게

물들고 있다.                                 2007. 11. 1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