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신경림 시인의 시와 인생 이야기

맑은 바람 2012. 4. 20. 17:46

 

-성북구 <평생 학습관> 오픈 기념 성북인 릴레이 특강-

 

35년간 정릉 토박이로 살아온 시인 신경림 선생이 성북인으로 초대되어 성북구청 평생학습관에 오셨다.

널리 애송되는 몇몇 시들의 소재가 된 사연들, 시인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억울하게(?) 옥살이한 이야기, 첫 부인과 사별, 재혼했으나 지금은 혼자 사는 이야기--

 

말이 매끄러운 건 아니나 소탈하고 솔직하여 남들은 꺼내기 어려울 것 같은 얘기도 술술 거침이 없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취중에 생긴 일들 이야기가 흥미롭다.

 

                       <가난한 사랑 노래>

***길음동 시절, 단골로 다니던 술집 딸의 사랑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

그 딸의 주례도 서주고 축시도 선물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갈대>

***역시 길음동 시절 문단 데뷔작.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던 그곳에는 창녀, 거지,

상이군인 들이 힘겹게들 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홍천강>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노릇하던 때의 경험이 녹아 있다.

 

뒷짐을 지고 서양개처럼 뛰면서 받아먹어야
초콜릿과 비스킷을 던져주는 조지나 톰보다도
레이션 한 상자를 훔치고서 짚차 뒤에 쇠줄로 묶여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연병장을 도는 못난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와
내가 베네트라는 백인장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고
야전침대에서 발치잠을 자다가
멀리서 들리는 야포소리에 잠이 깨어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보면
눈발이 모래알울 몰아다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담배 한 가치에 드로프스 한 알에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꿈속에서도 미웠다
달밤이면 승냥이 우는 소리에 섞여
중공군이 분다는 호적소리도 들리는데
기계충 오른 아이들만을 모아 사진을 찍고
통조림 깡통을 강물에 던져
허기진 아이들을 허겁지겁 살어름 언 물속에 뛰어들게 하는 그
백인장교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한밤에도 그는 금발의 딸사진을 꺼내보며 훌쩍대고
나는 머지않아 양키 대신 오랑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게 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걱정에 잠 설치는 밤이 많았다
잔치구경을 가는 날은 장난으로 총질을 해서 손님을 쫓고
심심풀이로 암소를 쏘아죽이는 흑인병사보다
말끝마다 이들을 은인이라 두둔하고
술대접에 허리가 굽는 동네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유난히 밤이 춥고 무서워 한밤중에
꺾어진 미루나뭇가지가 천막을 후려치고
얼음이 죽은 병사들의 웃음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홍천강이 그해 겨울 내게 가르친 것은 미움뿐이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읍내를 어슬렁거리며
삽작을 밀어보기도 하고 거적대기를 들춰보기도 하는
지아이보다도 읍내 처녀애들이 더 미워
영어마디나 배우겠다고 따라다니는 여학생애들이 더 미워
좀체 잠이 안 오는 그런 달밤이면 등너머에서는 승냥이가 울고
눈위로 미끄러지며 호적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이 고장에도
중공군이 온대서 홍천강은 겨우내 뒤숭숭했다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민주화운동 투사들과 옥중에서 만났을 때 씀.

시인 자신은 특별히 저항운동을 한 일도 없는데 다만 술김에 정치비판을 하다가 끌려가곤

했기 때문에 막걸리 반공법에 저촉된 것일뿐이라고 우스개소리처럼 말한다.

 

불길을 헤치고 물 속을 헤엄치고
가시밭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모두들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온 나라에 울려퍼지는
노래 크게 외쳐 부르면서

등에는 깊은 이빨자국
이마와 손바닥엔 아직 피 붉은 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끝내 흔들리지 않을 깃발
저 하늘 높이 세우기 위하여

철창에 뜨는 달  먼 산에 피는
아지랭이에 한숨쉬기도 했지만
모두들 주먹 다시 부르쥐는구나
어둠 이 땅 구석구석에서 몰아낼
큰 횃불 드놓아 밝히리라고

이제 우리 갈 길을 알았노라고
이웃과 함께 친구와 함께
갈가리 찢긴 이 땅덩어리와 함께
밟히고 꺾이고 으깨어져
조그맣게 움츠러든 이 겨레와 함께
이제 갈 길을 알았노라고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모두들 손에 손잡고 섰구나
저 강 건너 동녘을 향하여
새 햇살 새 별빛 아직 멀어도
잃을 것이 없는 자에겐 두려움이
없으니 망설임도 없으니

손과 발에 매인 사슬 끊어 던져라
아양과 눈웃음에 우린 속지 않는다
모두들 힘차게 달려가는구나
육천만 온 겨레 얼싸안고서
어깨동무하고 나갈 북소리 울리며

 

공감이 가는 말-

시인은 사회중심에서 한발 비껴 서있는 사람들이다.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세상을 더 바르게 볼 수 있고

그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201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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