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방/피정과 말씀

<예레미야서> 필사를 마치고

맑은 바람 2013. 12. 4. 21:50

 

<예레미야서><이사야서> 다음으로 분량이 많은데(98), 유다와 이스라엘이 북방의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끌려가 70년 동안 고난을 당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하느님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분노>

온 땅이 폐허가 되겠지만 아직 끝장은 내지 않겠다.’

다른 신을 섬기면서 하느님의 훈계와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한다.

하느님은 인격신이기에 분노가 저주로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마침내 바빌로니아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도록 하여 응징한다.

 

<서러워라, 유대인이여!>

우리는 유대인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600만 학살을 떠올리고, '베니스의 상인'의 고리 대금업자를 떠올린다. 유대인의 역사는 살육의 역사.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하느님의 노여움을 살 때마다 응징을 받아 몰살한다.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멸망하고 노예로 끌려가 고통 받고 죽는다.

로마시대에는 그 땅에서 쫓겨나 세계각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흩어진 곳에서 또 박해를 받고 죽는다.

 

그들이 2000년 후 미국의 동정(?)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와 건국한 뒤에도 4차례의 중동 전쟁에서 또 희생된다.

그렇게 인종 청소를 당하고도 그들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게 진정 하느님의 기적이 아닐까?

 

<이웃을 조심하라>

9:3~누구나 제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형제도 신뢰하지 마라.

형제들이 모두 사기꾼이요 이웃들이 모두 중상꾼이 되어 돌아다닌다.

하느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인간은 본디 악한 존재라는 말인가?

불신, 실망, 좌절, 절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 내뱉을 수 있는 말일까?

 

<되갚아 주마>

"내가 예루살렘을 폐허더미로, 승냥이 소굴로 만들고 유다 성읍들을 주민들이 없는 폐허로 만들리라."( 9:10)

예레미야서는 하느님의 철저한 미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 하는 걸

예고하는 이야기다.

정 때문에하는 우리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나 지금이나>

12:1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만~

 

<하느님의 징벌>

14:12 이 백성을 위하여 행복을 빌지 마라.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나는 그들을 전멸시키겠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런 벌을 한두 번 받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또 죄짓고 또 짓고 --인간의 속성은 끊임없이 벌 받을 짓을 하며 살게 되어 있는 족속인가보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이런 속성의 인간을 지으신 걸까?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나?

 

<예레미야의 저주>

18:21 그들의 자녀들을 굶주리게 하시고 그들을 칼날에 부치소서. 그들의 아내들이 자녀도 없는 과부가 되고 그 남편들은 흑사병에 걸려 죽어가며 젊은이들은 싸움터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소서.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예언자의 저주-

예레미야서 필사는 은총이 되지 못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에서 멀어지게 한다.

 

<하느님의 저주>

19:9 나는 그들이 제 아들딸들의 살을 먹게 하겠다. 그들은 원수들이 자신들을 포위한 채 목숨을 노리며 조여 오는 극심한 재난 가운데에서, 저마다 제 이웃의 살을 먹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무슨 말을 하리오?

 

<흑사병은 죄의 댓가?>

21:6 "내가 이 도성에 사는 것들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치리니, 그들이 무서운 흑사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명적인 흑사병으로 징벌하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일까?

 

<병주고 약주고-->

23:2-3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하느님이 정말 그러셨을까?

예레미야서를 쓴 이의 사적인 감정의 표현 아닐까? 믿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나의 종 네부카드네자르>

25:8-9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북쪽의 모든 족속들을 나의 종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불러 모으겠다.’

바빌로니아 후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에 올곧은 이>

27:5-6 큰 권능과 뻗은 팔로 이 세상과 거기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만든 이는 바로 나다. 나는 이 세상을 내가 보기에 올곧은 이에게 주겠다. 이제 나는 이 모든 나라를 나의 종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손에 맡겼고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맡겨 그를 섬길 것이다.’

그는 한때 올곧은 이였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핍박한 죄로 멸망한다.

왜 이스라엘 민족이 오늘날까지도 타민족들에게 배척의 대상이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정해진 이 질서가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주님의 말씀이다.-이스라엘의 후손도 내 앞에서 영원히 한 민족으로 남아 있으리라.”(31:36)

로마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어찌되었는가? 희망을 기록한 역사일뿐!

 

<천국과 지옥>

이제 내가 이 도성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다주겠다. 내가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넘치는 평화와 안정을 보여주겠다.(33:6)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에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33:8)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이는 독자를 잠시도 마음 놓지 못하게 한다.

이제 천국을 노래하려나 하면 어느새 지옥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쁨을 느긋하게 맛볼 수 없다. 언제 끔찍한 복수와 징벌이 다시 내릴지 몰라 두려우므로--

 

<아아, 하느님이시여!>

너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부수지 않겠으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을 후회하기 때문이다.”(42:10)

이집트 땅으로 얼굴을 돌려 그곳에 들어가 사는 자들은 모두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죽게 되어 그들 가운데에는 내가 그들에게 내릴 재앙에서 벗어나거나 빠져나가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42:17)

하느님은 유다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한 걸 후회하시면서 한편으로 유다 땅을 떠나려는 나머지 백성들을 만류하며 떠나면 뒤쫓아가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유다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땅에 태어난 걸 저주해야 하나?

하느님 백성된 걸 원망해야 하나?

 

<하느님의 감옥>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온 유다를 멸망시키겠다.”(44:11)

그들은 유다 땅에 태어난 덕(?)으로 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울타리에 갇힌다. 인간은 누군가의 제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하느님, 하느님!>

나의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나는 결코 너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46:28)

하느님은 병 주고 약 주시는 겁니까?

차라리 저를 잊어 주세요.

저를 버린 자식으로 여겨주세요.

 

<그러나 내가 뒷날-->

그러나 뒷날 내가 모압의 운명을 되돌리리라. 주님의 말씀이다.”(48:47)

그러나 그 뒤에 내가 암몬 자손들의 운명을 되돌리리라. 주님의 말씀이다.”(49:6)

온갖 재앙을 퍼부어 멸망시킨 후 약속하신다.

그러나 뒷날~ 운명을 되돌려 주리라.”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바빌론의 멸망>

그들에게 핍박받던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그들은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그들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성경 필사에서 건너기 어려운 대목이 <예레미아서>.

구약은 하느님의 사랑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은총은커녕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이어가게 한다.

어서 빨리 이 대목을 벗어나고 싶다.

 

<예레미야서가 나를 힘들게 한 이유>

수없이 반복되는 단어들-

, 굶주림, 흑사병, , 재앙, 전멸 원수, , 복수, 웃음거리, 수치, , 파멸, 파괴, 절망,

폐허, 저주, 살육, 환난, 공포, 통곡, 울부짖음, 징벌, 멸망, 참상, 쳐 죽이다. 해산하는 여인---

긍정의 단어들이 힘을 솟게 하고 미소 짓게 하는 반면, 부정어는 심사를 사납게 하고 우울하고 불행감마저 느끼게 한다.

말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