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방/피정과 말씀

<애가>, <바룩서>, <에제키엘서> 필사를 마치며

맑은 바람 2014. 1. 6. 01:09

 

-애가-

바빌론 유수 후의 폐허 예루살렘의 참상을 애통해하며 읊은 내용이다.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이 더 행복하여라!>

-인정 많은 여인들의 손이 제 자식들을 잡아 삶았구나. 내 딸 백성이 파멸할 때 자식들이 어미들의 양식이

되었구나.(4:10)

 

-바룩서-

바룩은 네리야의 아들로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지 오 년째 되던 해, 바빌론에서 쓴 것이다.

 

<하느님도 트릭을 가르쳐 주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머리를 숙여 바빌론 임금을 섬겨라. 그러면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2:21)

우상을 섬긴 대가를 치르는 이스라엘 민족, 그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명령을 따른다.

 

<희망을 놓지 않는 하느님>

-그들은 유배의 땅에서 나를 찬양하고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2:32)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단순하고 변덕스럽고 이해관계에 민감한 인간들을 잘 아실 텐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구나.

 

<유대민족이 배척당하는 이유>

-그분께서 슬기의 길을 모두 찾아내시어 당신 종 야곱과 당신께 사랑받는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리고 나서야 땅 위에 슬기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3:37-38)

-네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고 네 특권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지 마라.(4:3)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달갑게 여길 리 없다. 그들에게는 ‘我田引水격’으로 들릴 테니~~

 

<먼 곳의 민족>

-그분께서는 먼 곳에서 한 민족을 그들에게 끌어들이셨다. 그 민족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다른 언어를 쓰며

노인을 존경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자비하였다. 그들은 과부가 사랑하는 아들들을 끌어가고 혼자된

여인에게서 딸들을 앗아갔다.(4:15-16)

‘한 민족’은 바빌론을 가리키며 한때 융성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오늘 날 우리교회도~>

- 그들은 초상집에 온 사람들처럼, 자기네 신들 앞에서 소리치며 울부짖는다.(6:31)

우리나라의 교회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현상~ 목사는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예레미야의 편지>

-이런 거짓 신들보다는 차라리 제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임금이 되거나 주인이 집에서 쓸모 있게 쓸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게 낫다. (6:58)

예언자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신들을 두려워하며 숭배하는 일이 없도록 설득하는내용이다.

 

-에제키엘서-

BC 565년경, 사제 에제키엘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가에 머물 때 그에게 내린 환시를 기록한 것이다.

 

<하느님의 환시>

-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1:26-28)

인간이 두려움을 품고 만나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형상을 에제키엘이 설명하고 있다.

 

<저주의 끝은 어디에~>

-나는 또 너희에게 굶주림만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들을 보내어 너희 자식들을 앗아가게 하겠다.

그리고 흑사병과 피가 너 예루살렘을 휩쓸어 지나가게 하고 너를 칠 칼을 끌어들이겠다. 나 주님이 말하였다.”(5:17)

주 하느님의 분노의 회오리바람을 어찌 피할 수 있으랴~~

 

<이마의 표식>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9:4)

한때 <휴거>라는 예언서 비슷한 것이 떠돌아다녔는데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배신-땔감-황무지>

-주 하느님이 말한다.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불에 집어넣듯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렇게 하리라.--그들이 배신을 하였기에 나는 그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15:6-8)

성경필사를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느님은 자꾸 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주 하느님의 말은

‘너무 인간적’이어서 애증의 농도가 짙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하느님은 어디에~~

 

<내 생명을 걸고~>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하는데,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 딸들은

교만을 부리며 풍부한 양식을 가지고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면서도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손을

거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본 것처럼 그들을 없애버렸다. (16:48)

주 하느님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닌가? 그러면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는 어떤 의미일까?

<불륜 가운데의 그 여자>

-그 여자들은 내 사람이 되어 아들딸들을 낳았다.

-나는 너에게 내질투를 쏟겠다. 그러면 그들은 화를 터뜨리며 너를 다루고 너의 코와 귀를 잘라낼 것이다.(23:4-49)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탕녀에 비유하여 쓴 글이다.

비록 비유지만 지금 내가 베끼는 글이 성서의 내용이 맞나 싶게 곤혹스럽다.

 

<나의 종 다윗~>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37:24)

바빌론 유수 후의 다윗이라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규정>

-제후가 들어올 때에는 대문 현관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한다.

-제후도 백성이 들어올 때에 함께 들어오고 그들이 나갈 때에 함께 나가야 한다.

-너는 날마다 주님에게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46:8-15)

이런 규정들이 주 하느님에 의해 말해졌다니--

문득 ‘상당히 많은 시간’을 이렇게 아무런 울림이 없는 내용들을 카피하는데 보낸 것이 잘한 일인가 싶다.

유대인들도 과연 우리가 읽는 구약의 내용과 같은 것을 읽고 있을까? 그들은 오늘날 <여러 가지 규정들>을

어떻게 현대화시켜 실천할까?

 

<땅, 땅, 땅>

-북쪽 끝에서 헤틀론 길을 따라 르보 하맛과 하차르 에난까지, 다마스쿠스 영토를 북쪽으로 두고 하맛 옆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이르는 땅이 단을 위한 한몫이다.-아세르를 위한 한몫이다.--납탈리를 위한 한몫이다--(48:1)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후와 사제들이 살 땅의 크기를 다 정해 주시고 그들의 소유로 허락하신다.

인디언들이 ‘땅’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잠시 빌려 쓰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라는 생각과 대조적이다.

인디언을 내몰고 아메리카 땅을 차지한 이들은 바로 기독교도들이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