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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사랑-<문학의 집 서울> 수필공모전 입상

맑은 바람 2014. 12. 6. 08:04

<사랑으로 쓰는 서울, 우리동네 이야기 공모>

 

혜화동 사랑

 

내 최초의 유년의 기억은 종로구 연건동의 널따란 초가집이었다.

행랑채에 대학생들이 여럿 하숙을 했는데 햇살 좋은 겨울 대낮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소쿠리를 세운 후 쌀을 뿌려놓고 참새잡이를 했다. 어린 나도 그들 속에 끼어 짜릿한 재미를 맛보았다.

 

또래의 친구들이 하나둘 유치원(혜화)에 입학하자 나는 놀이 대상을 따라 유치원 마당에서 혼자 놀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함께 집으로 오곤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엄마는 손목을 잡아끌고 국민학교(창경)로 갔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후였지만 엄마한테 손등을 맞아가며 이름 석 자를 익힌 후 어찌어찌 나는 입학이 되었다.

 

유년의 기억은 빛바랜 앨범이 되어 가지만 문득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어릴 적 겨울밤이면 창경원에서 들려오던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에 잠이 깨어 두려움에 떨던 기억이 또렷이 떠오른다.

창경원 벚꽃놀이 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원남동 로터리부터 북적거리고 어린애들은 괜히 들떠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곤 했다.

 

6.25가 끝난 지 오래지 않은 때라 어려운 살림살이 정도가 그만그만했지만 우리의 이웃 동네 혜화동 사는 아이들은 옷매무새가 깔끔하고 언행도 단정해 보였다.

혜화동 이미지가 좋게 자리 잡은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으리라.

언젠가는 錦衣還鄕하는 기분으로 나도 그곳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머언 먼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처럼 나의 꿈이 이루어진 건 육십을 바라보는 때였다.

그 옛날 골목을 꽉 채우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콩닥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노란 유치원차 속에서 빠꼼히 내다보는 아이들과 마주칠뿐이다.

처음 이사 올 당시만 해도 큼지막한 집과 기와집 들이 꽤 많고 골목길로 들어서면 집집마다 무성한 나뭇가지에

새소리가 영롱해서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곳 같았다.

이제는 너도나도 좁은 땅에 많은 집을 들여놓아 옛날의 한적함이 덜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으로 이사하길 잘했다 싶은 것이, 햇살 좋은 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거나 뜰 한켠에 토마토, 고추, 가지 등을 심어 가꾸는 재미 쏠쏠해서 굳이 전원주택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

혜화동은 서울 성곽을 따라 조성되어 마을에 들어서면 옛 역사의 자취를 그대로 찾아 볼 수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한옥 주민센터를 갖고 있고 10여 년을 살았어도 좁은 골목 안에서 운전자들끼리 얼굴 붉히는 걸 본 적이 없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오월엔 옆집에서 분홍장미 한 다발을 꺾어다 주기도 하고 여름 끝물이면 아랫집 수녀님이 봉숭아 씨를 받아 건네주기도 한다.

11월 늦은 저녁, 코트를 여미고 대학로로 들어서면 젊은 기운이 넘쳐나 새로운 활력을 얻곤 한다.

 

귀향한 지 어느덧 13년째-

요즈음 나는 새로운 일거리를 시작해서 무척 바쁘다.

우리 집에 드나드는 외국인 손님과 밑천 딸리는 영어와 떠듬거리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더러 그들의 세탁물을 빨아주기도 하고

떠날 때엔 대문 밖까지 나가서 깊이 머리 숙여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혜화동 민간 외교관’이 된 것이다.

큰아들이 ‘외국인 홈스테이’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는 어릴 적 혜화동 사람들의 이미지-

이제는 내가 단정하고 깨끗한 몸가짐과 말투로 우리 집에 찾아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맞이하리라.

 

훗날

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혜화동의 이미지가 떠올라

문득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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